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이번편에서 끝낼수 있을까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73)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여덟번째)
앙주의 마르거리트
잉글랜드의 마거릿 왕비
헨리 6세의 왕비
Margaret of Anjou
(French: Marguerite; 23 March 1430 – 25 August 1482)
1475년경
워릭 백작은 비밀리에 프랑스에 있는 마거릿과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는 마거릿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의 결과 자신의 막내딸인 앤을 마거릿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시키기로 하죠. 그리고 워릭 백작은 먼저 잉글랜드로 가서 군사를 일으켜서 국왕인 헨리 6세를 복위 시키고, 마거릿은 뒤따라 가기로 합니다.
1470년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시킵니다. 하지만 런던탑에 갇혀있는 동안 헨리 6세의 상태는 더 나빠졌으며 결국 그는 통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동안 워릭 백작과 그의 사위이자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가 헨리 6세의 이름으로 통치를 합니다.
마거릿은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로 갑니다. 하지만 이때 행운은 다시 요크 가문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부르고뉴로 망명했던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1471년 4월 바넷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에서 워릭백작은 살해당했습니다.
바넷전투
결국 물러설 길이 없게 된 마거릿은 다시한번 에드워드 4세와 전투를 하게 됩니다. 1471년 5월 남아있던 랭카스터 가문 지지자들 대부분이 튜스크베리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랭카스터 가문측의 패배가 됩니다. 이 전투에서 랭카스터 가문의 계승권리를 갖는 남성 직계가 대부분 살해당하는데 헨리 6세의 외아들이자 마거릿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보퍼트 가문의 남성 직계 후손들 모두가 사망했습니다.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마거릿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전투중에 죽었는지 포로가 된 뒤 처형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튜크스베리 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재미난 사실은 이 튜크스베리 전투 이후 랭카스터 가문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계승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바로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인 에드먼드 튜더와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이었던 헨리 튜더였습니다. 랭카스터 직계가 모두 살해당했으며, 보퍼트 가문쪽도 남성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보퍼트 가문의 가장 연장자 가문의 여성 후계자가 바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였기 때문에, 헨리 튜더는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비록 잉글랜드 왕위계승권과는 무관했지만,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헨리 6세의 최 측근중 한명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레이디 마거릿 보러트는 아들을 서둘러 부르고뉴로 보냈었습니다.
튜크스베리 전투
튜크스베리 전투 얼마뒤 헨리 6세마저 런던탑에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의 죽음은 정확한 원인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에드워드 4세측 사람에 의해서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헨리 6세는 랭카스터 가문의 마지막 직계 왕위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가 살아있다면 또 누군가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일것입니다.
헨리 6세
남편과 아들을 잃은 마거릿은 이제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로써 자신의 전 시녀였던 서퍽 공작부인 앨리스 드 라 폴의 감시아래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비록 포로였지만 감시자였던 서퍽 공작부인은 한때 마거릿의 시녀였으며 아마 서퍽 공작부인은 여주인이었던 마거릿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거릿이 왕비로써의 어느정도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서퍽 공작부인인 앨리스는 결혼전 이름이 앨리스 초서입니다. "켄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제프리 초서의 손녀로, 그의 할머니는 랭카스터 공작부인의 시녀였으며,할머니의 언니인 캐서린 스윈포드는 랭카스터 공작부인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녀 역시 처음에는 랭카스터 가문쪽 사람이었습니다만 장미전쟁의 여느 귀족들처럼 편바꾸기를 했었던 것입니다.)
튜크스베리 전투 이후 포로가 된 마거릿
마거릿은 1475년까지 잉글랜드에 포로로 남아있었는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11세가 그녀의 몸값을 지불했고 1476년 1월 프랑스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로 돌아온 마거릿은 그다지 평안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사촌인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와 마찰을 빚게 되는데, 마거릿의 아버지 르네가 죽은 뒤의 재산상속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루이 11세는 마거릿의 몸값을 냈기에 르네의 유산은 자신이 가져야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마거릿은 아버지의 상속분은 다른 문제라고 여겼었던듯합니다.
마거릿은 1482년 사망했으며 부모곁에 묻혔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묘는 다른 많은 프랑스 왕가 사람들처럼 프랑스 대혁명기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마거릿은 남편과 아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도 뛰어드는 의지의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외국세력을 끌어들이거나 잉글랜드의 영토를 떼어주는 등의 행동을 했고 이런 행동은 그녀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릴수 없게 만들었을듯합니다.
마거릿과 헨리 6세 사이에서는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만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마거릿의 며느리였던 앤 네빌은 남편이 죽은뒤 언니와 형부의 집에 맡겨졌는데, 네빌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던 형부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가 앤을 수녀원에 보내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클라렌스 공작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였습니다. 워릭 백작은 처음에 앤을 리처드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지만 국왕의 반대로 결국 랭카스터 가문으로 시집보냈던 것이죠. 리처드 역시 상속녀인 앤의 지위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어쨌든 곤경에 빠진 lady를 멋진 기사가 구해주는 기사도 소설에 나오는 기사님처럼 앤에게 등장해서 앤과 결혼합니다. 재미난 사실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앤의 남편을 죽인 인물이 글로스터 공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이 두가지 사실이 맞물려 세익스피어 극 등에서는 글로스터 공작이 앤에게 흑심을 품고 에드워드를 살해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상속녀인 앤이 결혼하기 적당했다 정도입니다.-0-;;;)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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