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70)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다섯번째)

엘아라 2016. 6.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전쟁이야기는 정말 힘들어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70)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다섯번째)




앙주의 마르거리트

잉글랜드의 마거릿 왕비

헨리 6세의 왕비

Margaret of Anjou 

(French: Marguerite; 23 March 1430 – 25 August 1482) 

후대의 상상화


장미전쟁의 시작은 1455년에 일어난 세인트 알반스 전투가 그 시작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사실 마거릿이 직접 관계된 전투가 아니었으며, 이때문에 학자들중 일부는 마거릿이 이때까지도 요크 공작과 불화를 빚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1453년 헨리 6세의 상태각 극도로 나빠졌으며 국정 운영을 수행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따라 왕가의 친척이자 권신중 한명이었던 요크 공작이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국왕의 측근이었던 서머셋 공작(에드먼드 보퍼트)는 요크 공작의 정적으로 그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했었습니다. 결국 요크 공작은 서머셋 공작을 투옥하는등의 행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헨리 6세의 상태가 갑작스럽게 회복되면서 권력의 축은 다시 이동하게 되죠. 서머셋 공작은 풀려나고 요크 공작은 실각하게 됩니다.



서머셋 공작과 요크 공작의 불화

흰장미쪽이 요크 공작, 붉은 장미쪽이 서머셋 공작


1455년 4월 중순에 헨리 6세와 궁정 조신들은 레이스터에서 의회를 개최하기로 합니다. 요크 공작은 이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요크 공작은 자신의 처남이었던 샐리스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그의 아들인 워릭백작 리처드 네빌(킹메이커로 알려진 인물)과 함께 군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레이스터를 향해 진격합니다. 결국 요크 공작의 군대와 국왕의 군대는 1455년 5월 22일 세인트 알반스에서 만났고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 전투가 제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로 장미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로 알려지게 되는 전투입니다.




제 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에서의 지도



이 전투에서 헨리 6세 측은 패배했고, 중요 인물이었던 서머셋 공작이나 노섬벌랜드 백작은 전사했으며 국왕과 버킹엄 공작 등은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이 전투 결과 권력은 다시 요크 공작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요크 공작은 이전의 지위를 다시 돌려받았으며 그의 경쟁자들 모두를 제거했기에 이제 요크 공작에게 남아있는 장애물은 없을 것 처럼 보였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국왕 헨리 6세는 명목상 국왕으로 남았으며 실권은 요크 공작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상황에서 요크 공작은 자신의 왕위계승권에 대해서 고려했을 것입니다.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국왕이 되었을때와 비슷한 양상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는 요크 공작인 에드먼드로 랭카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의 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랭카스터 공작의 형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그의 왕위계승권이 헨리 6세보다 못할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실권과 왕위계승을 위한 정당성까지 가지고 있던 요크 공작이 왕위계승을 노리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의 문장


하지만 이런 요크 공작의 계획에 마거릿은 장애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거릿은 국왕까지 포로로 잡았으며 점차 권력을 강화했던 요크 공작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됩니다. 헨리 6세의 정당한 상속자는 그녀의 아들이었으며, 요크 공작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노리는 것은 아들의 상속권을 가로채려하는 행동이었기에 그를 주시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헨리 6세의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고, 이런 반복은 마거릿이 국왕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되는 바탕이 됩니다. 아마도 핵심 측근들이 거의 사라진 헨리 6세에게 의지할만한 사람은 아내인 마거릿밖에 없었을 것이며, 강인한 의지의 마거릿은 남편인 헨리 6세가 의지할만한 사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에서 지지세력을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헨리 6세는 국왕이었으며 국왕에 동조하는 인물들 역시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거릿은 이런 세력들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헨리 6세가 해야할 일이었지만 헨리 6세의 상태는 이런 일을 할만큼 좋지 않았고, 아버지 대신 영지를 통치했던 할머니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기까지 했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마거릿은 당연히 남편을 대신해서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며 결국 그녀는 랭카스터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게 됩니다. 

또 마거릿은 잉글랜드 내 세력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던 프랑스 측 인물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피에르 드 브레제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피에르 드 브레제의 아들인 자크는 아녜스 소렐과 샤를 7세의 딸인 샤를로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후손이 루이 드 브레제이고, 루이의 아내가 바로 그 유명한 디안 드 푸아티에입니다. 루이와 디안의 딸중 한명은 기즈가문으로 시집갔고 이 딸의 후손은 사보이 공작가문으로 시집가면서, 이탈리아 왕가의 선조들중 한명이 된다고합니다.)


하지만 피에르 드 브레제와의 관계는 마거릿에게 해가 됩니다. 1457년 피에르 드 브레제는 잉글랜드에 상륙했으며 샌드위치를 방화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잉글랜드의 혼란을 초래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며, 이 상황에 대해서 잉글랜드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거릿이 자신의 세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프랑스 장군을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했고, 군대의 실권을 요크 공작의 측근이었던 워릭 백작에게 넘어가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인 마찰이 진행되면서, 마거릿을 중심으로 하는 랭카스터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요크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요크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갈등을 점점 깊어가게 됩니다. 결국 1459년 후반이 되면서 이 갈등은 결국 본격적인 전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