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아직도 장미전쟁 이야기 보고 있습니다.ㅠ.ㅠ
귀족들이 대량으로 죽어나가고, 요리조리 편을 바꾸고, 결국은 친척인데 미친듯이 쌈질하고...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점점 깊어지면서 점차 잔인해지고....ㅠ.ㅠ
...역시 내전으로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는듯해요.
잉글랜드의 왕비들...(72)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일곱번째)
앙주의 마르거리트
잉글랜드의 마거릿 왕비
헨리 6세의 왕비
Margaret of Anjou
(French: Marguerite; 23 March 1430 – 25 August 1482)
아들과 함께 겨우 전장에서 도망친 마거릿
후대의 역사화
남편과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도망친 마거릿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향이자 사촌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와 연합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루이 11세의 어머니는 앙주의 마리로 마거릿의 고모이기도 했었습니다. 1462년 마거릿은 프랑스로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죠.
루이 11세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쨌든 마거릿에게 병력을 지원했으며, 마거릿은 피에르 드 브레제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다시 왕위를 찾기 위한 전투를 진행합니다. 사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긴 했지만, 잉글랜드 북쪽 지역은 여전히 랭카스터 가문을 지지했으며 요크 가문의 국왕인 에드워드 4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저항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거릿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서 도움을 얻었을때 다시 왕위를 찾을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마거릿에게 유리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결국 마거릿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마거릿은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해야했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
마거릿의 사촌
헨리 6세는 다시 잉글랜드로 갔었는데 아마도 남아있는 랭카스터 가문 사람들이 중심인물인 국왕이 있어야한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1464년 핵섬 전투에서 랭카스터 가문 서머셋 공작을 비롯한 랭카스터 가문의 핵심인물들이 대부분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1465년에는 헨리 6세마저 에드워드 4세에게 사로잡히게 되죠. 헨리 6세는 런던탑에 감금당하게 됩니다.
이 상황은 결국 잉글랜드의 왕위가 요크 가문 출신의 국왕인 에드워드 4세에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거릿에게 기회가 없어보였죠. 하지만 요크 가문의 내부분열은 마거릿에게 기회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에드워드 4세가 국왕이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은 바로 "킹메이커"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워릭백작 리처드 네빌이었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랭카스터 공작의 딸이었던 조앤 보퍼트였으며, 고모인 시슬리 네빌은 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재산의 상속녀였던 워릭 백작의 딸과 결혼하므로써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에 더해서 엄청난 재산을 더 가지고 있었기에 국왕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워릭백작의 세력에 대해서 에드워드 4세는 처음에는 도움을 받았지만 국왕이 된 후에는 그에 대한 경계를 어느정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틀어진것은 에드워드 4세의 결혼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
워릭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공주와 결혼해서, 프랑스가 마거릿을 지원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꽤나 좋은 생각이었지만 에드워드 4세는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혀 도움이 안되는 여성이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해버립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심지어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아들이 둘 딸린 과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재산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여성이었다면 과부인것도 그다지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만, 그녀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궁정에서 유일하게 왕위계승권과는 전혀 관계없는 가문 다시 말해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 4세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됩니다. 워릭 백작의 입장에서는 외교로 프랑스를 끌어들일 좋은 기회를 에드워드가 차버린것이었으며,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안그래도 영향력이 너무 큰 워릭 백작이 더 영향력을 확대한다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식
게다가 워릭 백작이 딸을 에드워드의 동생과 결혼시키려 했을때 에드워드 4세가 반대했고 이 상황은 워릭 백작이 국왕에 대해 반발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자신은 하지 않았지만 동생들은 외국 왕가의 여성과 결혼하길 바랍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외교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하나는 강성한 세력의 워릭 백작의 딸들과 동생들이 맺어진다면 동생들의 권력이 너무 강화되어서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대는 워릭 백작의 반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마도 워릭 백작 역시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경계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때문에 그는 에드워드 4세의 적과 손을 잡으려 합니다. 바로 프랑스에 망명해있는 마거릿이었죠.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 4세의 불화는 7년간 프랑스에 망명해있던 마거릿에게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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