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63)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6. 3.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엉엉엉..바빠요...

그런데 글을 안썼어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63)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세번째)




카트린 드 발루아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Valois 

(27 October 1401 – 3 January 1437)

상상화


남편이 죽었을때 아들은 너무 어렸으며 카트린 역시 너무 어렸었죠. 게다가 프랑스 공주였던 카트린은 주변 세력조차 미미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카트린이 아들의 양육에서 소외당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카트린은 젊었기 때문에 섭정단의 일부는 그녀가 재혼할것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카트린은 미성년인 국왕의 모후였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가 결혼할 경우 그녀의 남편이 될 남성이 잉글랜드의 권력을 장악할수도 있는 문제가 될수있었기에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실제로 에드워드 2세의 왕비였던 이사벨라 왕비는 연인이었던 로저 모티머를 통해 실권을 장악했으며 미성년 아들의 섭정으로 로저 모티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하기도 했었습니다. 

곧 카트린이 국왕의 친척이었던 에드먼드 보퍼트(후에 2대 서머셋 공작)과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 헨리 5세의 동생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강하게 반대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미 섭정단에 보퍼트 가문 사람들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견제가 어느정도 있었던듯합니다. 결국 의회는 모후인 카트린이 국왕의 허가 없이 결혼할경우 카트린과 결혼한 남편의 지위와 재산을 뺏는다는 법률을 통과시키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의회의 결정이 있었을때, 헨리 6세는 겨우 여섯살로 실제로 섭정단이 거부하는 남자와 결혼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었죠.



프랑스에서 즉위식을 하는 헨리 6세


처음에 카트린은 국왕의 식솔로 지냈었는데 이것은 아들을 돌볼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하지만 섭정단이 카트린을 감시할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었죠. 아직 젊었던 카트린은 정치에서 소외당했으며 허락없이 결혼도 할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아마도 외로움을 느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기사와 연애관계가 되게 됩니다. 이 상황은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황이 되게 되죠.


카트린과 연애 관계가 된 사람은 오웬 튜더라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웨일즈 출신의 기사로 헨리 5세의 신하를 섬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카트린의 주변 인물들은 카트린과 오웬 튜더와의 관계를 알았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발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웬 튜더는 웨일즈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는 거의 세력이 없던 인물이었기에 카트린과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잉글랜드의 정치에 관여할만한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웬 튜더의 문장


카트린은 1420년대 후반 아들인 헨리 6세와 더 이상 함께 지내지 않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의 즉위식등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헨리 6세의 공식 기록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제 카트린이 더이상 아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쯤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되죠. 


아마도 의회는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사이를 적당히 묵인해줬던듯합니다. 적어도 카트린은 정치에 관여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오웬 튜더 역시 마찬가지였었죠. 그와의 관계가 알려질 무렵 카트린은 아들곁을 떠나게 되었을 것입니다만 대신 오웬 튜더와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오웬 튜더는 의회에서 "잉글랜드인의 권리"를 인정받기 때문이죠. 당시에 웨일즈인은 잉글랜드에서 차별당했었기에 국왕의 모후와 같이 지내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정도 대우를 해준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회가 둘의 결혼을 허락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둘의 결혼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둘이 결혼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또 국왕의 허락없이 결혼할수 없다는 의회의 결정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죠. 


사실 이런 상황은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냥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자녀들은 적당히 잉글랜드 귀족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6세의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자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가문인 보퍼트 가문의 중요성이 강화되었으며 결국 보퍼트 공작의 딸이었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왕위계승권이 중요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가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헨리 6세가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튜더를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시켰으며, 둘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후에 랭카스터 가문은 물론 보퍼트 가문의 남성 직계 후손들이 단절된 뒤 랭카스터가문의 계승권리를 이어받게 되게 되죠. 이런 상황 때문에 카트린과 오웬 튜더가 정식 결혼했는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해지게 됩니다. 둘이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면 둘의 자녀들은 백작지위를 받았더라도 사생아였으며, 이런 사생아의 후손인 헨리 튜더가 국왕이 될 만한 신분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리처드 3세가 헨리 튜더에 대해서 이중으로 사생아였다고 비난한것도 이런 맥락이었죠. (물론 보퍼트 가문 혈통까지 비난한건 좀...=-= 자기 외할머니도 보퍼트 가문 출신인데 말입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 특히 튜더 시대 역사가들은 아마 카트린이 아들을 떠난뒤 오웬 튜더와 비밀리에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았다고 주장하면서 튜더 가문의 정통성에 힘을 실어줬다고 합니다.

뭐 물론 정복왕 윌리엄도 사생아 출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잉글랜드에서 이런 문제를 따지는 것은 좀 우습긴 하지만요.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