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65)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다섯번째)

엘아라 2016. 3. 3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바쁘니까 그냥 늘려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65)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다섯번째)



카트린 드 발루아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Valois 

(27 October 1401 – 3 January 1437)

잉글랜드 왕비로써의 카트린 드 발루아의 문장


카트린 드 발루아는 두번의 결혼을 통해서 여러명의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첫번째 결혼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5세와의 결혼이었죠. 이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으며 둘사이에는 아들인 헨리 6세만이 태어납니다. 왜냐면 아들이 태어난 뒤 얼마되지 않아서 헨리 5세가 전장에서 병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트린의 장남이었던 헨리 6세는 만으로 한살이 되기전 이미 국왕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그의 주변 친척들과 신하들이 섭정단을 구성해서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했죠.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그였지만 신하들의 다툼은 결국 잉글랜드 내의 내전인 "장미전쟁"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헨리 6세 치내동안 장미전쟁이 시작되었지만, 헨리 6세는 군인으로써는 "무능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대신 그의 아내인 앙주의 마거릿이 그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평가 되었죠.

부인인 앙주의 마거릿 사이에서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있었지만 내전에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요크 가문의 계승권을 인정해야만했었죠. 이런 상황은 앙주의 마거릿이 요크 공작 리처드를 공격하게 만들었었습니다.

이후 다시 요크가문이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헨리 6세는 갇혀있던 런던탑에서 살해당했으며, 그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역시 전장에서 사망했었습니다. 헨리 6세와 웨일즈 공 에드워드는 물론 보퍼트 가문의 남성직계마저 모두 살해당했기에, 결국 랭카스터 가문의 권리는 카트린의 손자이자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이었던 헨리 튜더에게 돌아가게 되었죠.



카트린의 장남 

잉글랜드의 헨리 6세


카트린의 두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중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는 아이는 셋 정도입니다. 나머지 두명의 경우 헨리 7세의 개인 역사가였던 인물의 기록에만 나온다고 합니다. 기록이 확실한 셋중 막내는 딸인 마거릿으로 카트린은 이 아이를 낳은 후에 사망했습니다. 


카트린과 오웬 튜더와의 첫아이는 에드먼드 튜더였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어머니와 떨어져서 동생과 함께 서퍽 백작의 누이였던 캐서린 드 라폴의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이후 캐서린 드 라폴은 국왕인 헨리 6세에게 탄원해서 에드먼드와 그의 동생인 재스퍼를 궁정에서 키우도록 하죠.

에드먼드는 형에게서 "리치몬드 백작"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인 보퍼트 가문의 상속녀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죠. 이것은 헨리 6세가 후계자 문제 때문에 고민하면서 내린 결단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둘의 결혼 직후 장미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에드먼드 튜더는 장미전쟁 직후 포로로 잡힌뒤 병사했습니다. 그가 죽었을때 그의 아내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임신중이었고 외동아들인 헨리 튜더를 낳았었죠. 그리고 그가 바로 헨리 7세입니다.



에드먼드 튜더

리치몬드 백작

헨리 7세의 아버지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둘째 아이는 재스퍼 튜더입니다. 그는 어린시절 형과 함께 성장했으며, 이부형인 헨리 6세에 의해서 펌브로크 백작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장미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관되게 랭카스터 가문측에 참전합니다. 특히 그의 형인 에드먼드가 죽고 난뒤 형수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조카였던 헨리 튜더를 보살피는 데 노력했었습니다. 그리고 조카인 헨리 튜더가 랭카스터 가문의 상속권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되면서 조카와 함께 브르타뉴로 망명했었었죠. 조카를 가르치고 조카가 잉글랜드 왕위를 얻기 위해 전장으로 갈때 큰 기여를 했었기에 헨리 7세는 왕위에 오른 뒤 숙부에게 베드포드 공작 지위를 부여했었습니다.



재스퍼 튜더의 문장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셋째아이는 아들인 오웬으로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헨리 7세의 개인 역사가였던 폴리도루스 베르길리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직자로 키워지기 위해 수도원에 맡겨졌으며 "에드워드 브리지워터"라는 이름의 수도사로 살았다고 합니다. 또 폴리도루스 베르길리우스는 수녀가 된 딸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카트린은 정략결혼이었던 첫번째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의 국왕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서 한 두번째 결혼을 통해서 튜더 가문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의 선조가 되었으며 또 혼인관계를 통해서 전 유럽의 왕가의 선조가 되기도 합니다.


카트린 드 발루아의 손자

헨리 튜더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