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62)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16. 3. 1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글이 안 읽히고 잘 써지지도 않아요..엉엉엉...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62) 카트린 드 발루아 : 헨리 5세의 왕비(두번째)




카트린 드 발루아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Valois 

(27 October 1401 – 3 January 1437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결혼식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잉글랜드는 헨리 5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에드워드 3세시절부터 이미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시작했었죠. 그 상황은 카페 왕가의 남성직계가 단절되면서 방계 가문인 발루아 가문과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던 에드워드 3세의 계승권 주장에 대한 복잡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헨리 4세 시절은 잉글랜드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헨리 4세는 사촌이었던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국왕이 되었기에 잉글랜드 내부의 반발 세력을 잠재우는데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보다는 평화조약을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즉위하고 나서 잉글랜드 상황이 안정되면서 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국왕 샤를 6세는 정신병이 심해졌으며, 정치를 주도하던 왕비 이자보는 굉장히 인기가 없었죠. 이때문에 암살이나 내전 상황이 일어나는등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프랑스였기에 헨리 5세는 프랑스를 공격할만한 적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쩌면 헨리 5세의 정당성과 연결되는 것일 듯합니다. 헨리 5세의 아버지인 헨리 4세는 사실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었었죠.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국왕이 되었기에 정통성이 약했습니다. 게다가 복잡한 왕위계승권을 따지기 시작할 경우, 여성 계승권을 인정하는 잉글랜드에서 헨리 4세는 다른 가문 사람들보타 계승권에 밀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헨리 5세는 정당한 계승자로써 증조할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통치 권리"를 물려받았기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듯합니다.



헨리 5세


이런 상황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내의 전쟁을 불러 오게 됩니다.그리고 세익스피어 희곡으로 유명한 헨리 5세의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특히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 이후 승기를 잡았고 프랑스에 자신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를 강요할수 있게 됩니다. 헨리 5세는 사실상 프랑스를 점령한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과 샤를 6세의 딸이 결혼하면서 사위로써 프랑스의 계승자가 되는 방안을 선택한 것이었죠. 그리고 이 중간의 역할을 하게된 샤를 6세의 딸이 바로 카트린 드 발루아였습니다. 당시 샤를 6세의 딸들중 수녀도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았던 유일한 딸이 카트린이었기에 카트린과 헨리가 결혼하게 된 것이었죠.


헨리 5세가 카트린을 첨 만났을때 그녀에게 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 어짜피 카트린과 결혼해야 했던 헨리 5세는 마음에 드는 부인을 얻게 되어서 더 흡족했을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1420년 카트린은 프랑스에서 헨리 5세와 결혼해서 그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421년 잉글랜드로 가서 잉글랜드의 왕비로 대관하게 되죠.



헨리와 카트린의 결혼

상상화



헨리 5세는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므로써 샤를 6세와 그 측근들에게 프랑스의 상속자라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샤를 6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기에 이 상황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샤를 6세의 아들이자 헨리 5세의 처남이었던 샤를 7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도팽으로 아버지의 후계자였지만 헨리에게 그 지위를 뺏길 위기였었습니다. 하지만 헨리는 외국인이었고 프랑스 귀족들은 헨리를 국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길 거부하게 됩니다. 결국 헨리와 카트린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 진행되게 되죠.


잉글랜드로 돌아왔던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자 아내를 두고 다시 프랑스로 갔었습니다. 1421년 6월 프랑스로 떠났는데 이때 카트린은 임신중이었죠. 그리고 그해 말인 1421년 12월 아들인 헨리를 낳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계승자이자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다시한번 승리한다면 프랑스의 계승자가 될 아들이었죠. 하지만 이 어린 헨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1422년 8월 헨리 5세는 아마도 이질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는 죽기 직전 동생인 베드포드 공작인 랭카스터의 존을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지정했었습니다.  만 22살도 안된 카트린은 한살도 안된 어린 아들을 둔 과부가 되었었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