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후아나와 헨리 4세 사이에는 자녀가 없거든요.
후아나의 애들은 모두 첫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인데 이에 대해서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입니다.
쓰다 필받으면 하고 아님 말죠..ㅎㅎㅎㅎ
잉글랜드의 왕비들...(59) 나바라의 후아나 : 헨리 4세의 왕비 (두번째)
나바라의 후아나
브르타뉴 공작부인
잉글랜드의 왕비
Joan of Navarre,
Joanna of Navarre
(c. 1370 – 10 June 1437)
후아나와 브르타뉴 공작의 결혼
1380년경 후아나는 카스티야쪽과 혼담이 진행됩니다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참고 자료에는 이렇게 적혀있는데 카스티야쪽에는 결혼할만한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후안이라고 적혀있는걸 보면 카스티야의 후안 1세가 유력하긴하거든요. 하지만 그의 첫번째 아내가 1382년 죽는단 말입니다.--;;;;)
1381년경 후아나는 두 오빠들과 함께 파리로 가게 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왕위을 노렸으며 프랑스 내 여려 영지들을 지키기 위해 여러번 편을 바꿨고 이런 상황은 후아나와 두 오빠들을 인질로 잡게 만들었었을듯 합니다. 카스티야의 국왕이었던 후안 1세는 후아나의 오빠인 카를로스의 처남이었으며 이때문에 아마 중재자 역할을 해서 모두 돌아올수 있었다고 합니다.
1386년 후아나와 브르타뉴 공작과의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이 혼담을 주선한 사람들은 당시 프랑스의 실권을 잡고 있던 후아나의 외삼촌들인 베리 공작 장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였죠. 이들은 브르타뉴 공작과의 우호를 바랬으며 후아나와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장 4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장 4세는 몽포르 백작이었던 장 드 몽포르의 아들로 장 드 몽포르는 이복형인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죽자, 자신이 브르타뉴 공작령을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또 다른 계승권 주장자는 장 드 몽포르의 이복형이자 장 3세의 동생이었던 팡티에브르 백작 기의 딸인 잔느 드 팡티에브르였습니다. 복잡한 계승 전쟁의 결과 결국 장 4세가 브르타뉴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때 잉글랜드는 장 4세의 계승을 지지했었죠. 결국 이런 상황은 프랑스와 브르타뉴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었고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후아나와 브르타뉴 공작과의 혼담이 진행된것이었습니다.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장 4세는 후아나보다 30살 정도 더 많았으며, 이전에 두번이나 결혼했었습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딸인 메리였죠. 하지만 결혼 직후 메리는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조앤 홀랜드와 재혼했습니다. 조앤 홀랜드는 켄트의 여백작이자 후에 리처드 2세의 어머니가 되는 켄트의 조앤과 그녀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토마스 홀랜드의 딸로, 리처드 2세의 이부누나였습니다. 그녀는 결혼 18년만에 자녀없이 사망했습니다.
후아나는 결혼 다음해부터 거의 연년생으로 아홉아이들을 낳습니다. 그중 두딸을 제외한 일곱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프랑스의 샤를 8세와 루이 12세와 결혼하는 안 드 브르타뉴는 후아나의 증손녀였습니다.
후아나의 남편인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는 1399년 사망합니다. 그녀의 아들이자 남편의 후계자인 장 5세는 미성년자였기에 후아나가 섭정으로 브르타뉴를 통치했다고 합니다. 이시기 브르타뉴는 어려움을 겪는데 브르타뉴 공작령 근처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공작령이 자리잡았고 이런 상황은 브르타뉴에 위험으로 다가왔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남편의 정적이었던 인물을 중용했는데 이런 상황은 아마 선대 공작을 지지했던 세력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일이었을 듯합니다.
남편의 무덤 옆에서 아들 아르투르와 함께 있는 후아나
후대의 상상화
브르타뉴 공작인 장 4세가 죽기전 브르타뉴 공작의 궁정에 한 사람이 오게 됩니다. 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에게 추방당한 더비 백작 볼링블룩의 헨리였죠. 헨리의 아버지는 랭카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었고, 리처드 2세는 헨리의 사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헨리를 자신의 왕권에 위협적 존재로 여겼던 리처드는 헨리를 잉글랜드에서 추방했으며 이때문에 헨리는 브르타뉴 공작의 궁정으로 망명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후아나는 헨리를 알게 되었을듯합니다.
후아나의 남편이 죽던해 헨리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브르타뉴는 어려움에 처해있었으며 후아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고려합니다. 이것은 잉글랜드 쪽에도 유리한것으로 브르타뉴와 잉글랜드는 오랜 동맹관계였었지만, 장 4세가 후아나와 결혼할무렵에는 잉글랜드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져있었죠.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의 어머니와 잉글랜드 국왕이 결혼하므로써 두 나라간의 동맹을 다시 시작할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후아나는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올것이기에 잉글랜드쪽에서도 손해날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헨리 4세의 대관식
1402년경 후아나는 헨리 4세와의 대리혼을 치뤘으며 이제 잉글랜드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403년 잉글랜드에 도착한 후아나는 헨리 4세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이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앞쪽과 동일
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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