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17) 올가왕비의 자녀들과 후손들:세번째

엘아라 2016. 1.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0-;;;;;;;;

올해는 새해특집 진짜 오래도록 했네요..ㅎㅎㅎㅎㅎㅎㅎ


[새해특집] 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17) 올가왕비의 자녀들과 후손들:세번째


올가 왕비의 다섯째 아이는 딸인 마리아입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시누이이자 러시아의 황후였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의 이름을 딴것일것입니다. 왜냐면 마리아의 애칭도 마리야 황후의 애칭과 같은 "미니"였기때문이죠. 마리아는 어머니가 자신의 고국인 러시아를 사랑했던것처럼 자신이 태어난 그리스를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다른 많은 왕실 여성들처럼 마리아 역시 결혼해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에 남고 싶었지만 그리스인과는 결혼할수 없었기에 결국 친척이었던 러시아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결혼합니다. 대공도 오래도록 미혼으로 있었는데 아마도 둘다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적당한 상대로 생각해서 결혼했던듯합니다. 마리아는 고모인 마리야 황후와 사촌인 크세니아 여대공과 매우 친한 사이였는데 특히 마리아의 남편과 크세니아의 남편은 형제간이었기에 크세니아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고 합니다. 혁명이 일어났을때 마리아는 딸들과 함께 러시아에 있지 않았고 이때문에 목숨을 건질수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남편은 살해당했었죠. 후에 마리아는 1922년 그리스 해군 제독과 재혼했었으며 그리스에서 살았었습니다.

마리아는 게오르기 대공과의 사이에서 두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큰딸인 니나 게오르기예브나 공녀는 혁명이 일어난 뒤 런던에서 역시 러시아 망명객이었던 귀족과 결혼합니다. 이후 둘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아마도 니나의 동생인 크세니아가 미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니나는 화가로, 니나의 남편은 작가로 활동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둘째딸인 크세니아 게오르기예브나 공녀는 미국인이었던 윌리엄 비트맨 리즈 주니어와 결혼합니다. 그는 크세니아의 외삼촌이었던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의붓아들로, 그의 어머니가 바로 낸시 리즈였습니다. 둘은 외삼촌과 어머니때문에 처음 만났는데 사랑에 빠져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었죠. 하지만 결국 둘은 이혼하고 크세니아는 다시 미국인과 재혼했었습니다. 크세니아는 안나 앤더슨의 미국인 후원자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첫남편인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올가 왕비의 여섯째아이는 딸인 올가입니다만, 올가는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올가 왕비의 일곱째아이는 아들인 안드레아스입니다. 그는 필립공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안드레아스 왕자는 가족중에서 가장 그리스인이라는 인식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이들과 대화할때 영어로 이야기했고 아이들도 영어로 대화했습니다만, 안드레아스 왕자는 그리스어만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영어도 알고 그리스어도 알고 독일어도 알고 프랑스어도 알고 러시아어도 알아서 안드레아스 왕자가 그리스어로 말한다고 못알아듣진 않았습니다. 반대로 안드레아스 왕자도 그랬구요.)

평생 그리스 군인으로 살았던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두번의 망명생활은 견디기 힘든것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두번째 망명으로 인해 그리스로 돌아갈수있는 확률이 거의 희박해지면서 너무나 견디기 힘든것이었죠. 이런 상황은 그의 아내가 아프면서 가족들이 헤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딸들은 어머니의 병이 알려지기 전에 얼른 시집갔고(..엄마가 정신병이 있다면 혼담을 꺼리니까..-0-;;;)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내인 앨리스는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아들인 필립은 외가에 맡겨지게 됩니다. 안드레아스는 자신도 주체할수 없는 상황에서 더 힘든 상황이 되자 그냥 모든것을 포기하게 되죠. 그는 사교계의 즐거운 살메 몸을 맡기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갔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후에 아들에게 빚으로 돌아가게 되죠-0-;;;

안드레아스는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유명한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가 예뻐한 헤센의 빅토리아 였으며,그녀의 아버지는 역시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가 총애한 신하인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였습니다. 안드레아스와 앨리스는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었으며 오래도록 행복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개인적 불행은 결국 앨리스에게 정신병을 가져왔으며 결국 둘은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별거로 결혼생활의 끝을 맺게 되죠.



안드레아스와 앨리스


안드레아스에게는 모두 다섯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중 네명이 딸이었는데 막내인 필립이 태어났을때 가족들은 "드디어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라고 이야기할정도였죠.

안드레아스 왕자의 첫째는 딸인 마르가리타입니다. 그녀는 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고트프리트와 결혼했습니다. 고트프리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였던 에든버러의 알렉산드라였죠.

둘째딸은 테오도라로 그녀는 바덴 가문의 수장이었던 베르톨트와 결혼했습니다. 베르톨트의 아버지는 바덴의 막스로 1차대전때 빌헬름 1세의 마지막 수상이자 그를 퇴위시키고 전쟁을 종결시킨인물로 유명하죠. 베르톨트의 어머니는 하노버의 마리 루이즈로 마리 루이즈의 어머니는 덴마크의 티라였습니다. 

셋째딸은 세실(케킬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안드레아스 왕자가 가장 사랑한 딸이었는데 세실은 어릴때부터 아빠를 가장 잘 따르는 딸이기도 했었습니다. 세실은 어머니의 사촌이었던 헤센 대공가의 후계자였던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결혼했습니다. 세실은 비행기 사고로 남편과 두아들과 시어머니와 함께 사망했으며, 세실의 딸이었던 요한나 역시 부모가 죽은 얼마뒤 병으로 사망하죠. 이 사고는 가족에게 매우 충격이었는데 필립공은 후에 누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때 충격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언급할정도였습니다. 세실의 장례식때 어느정도 회복했던 앨리스가 장례식에 왔었고 이에 마르가리타는 "세실이 죽어서 우리 가족을 다 모이게 했다"라고 슬퍼했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스는 세실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데 그는 장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날이 갈수록 세실이 생각난다고 적고있다고 합니다.

막내딸은 소피아입니다. 그녀는 자매들중 가장 먼저 결혼했는데 결혼했을때 겨우 16살이었죠. 그녀는 헤센 카셀의 크리스토프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던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였습니다. 헤센-카셀가문은 나치에 가담한것으로 유명했으며 크리스토프 역시 ss친위대였습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어려서 결혼했으며 많은 그리스 왕족들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2차대전중 사망했으며 소피는 다섯아이의 과부가 됩니다. 막내는 유복자였죠. 미군이 들어오면서 소피아는 자신의 아이 다섯과 시아주버니의 아이들 넷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야했는데 친척이었던 헤센 대공가로 갔었다고 합니다. 언니는 죽고 없었지만 친척이었던 헤센 대공가문의 수장인 루드비히는 친영국파였기에 그의 집은 어느정도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소피아는 루드비히의 아내인 페기와 매우 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피아는 전쟁후에 하노버의 게오르그 빌헬름 공과 재혼해으며 재혼후 세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고 합니다.

안드레아스의 막내는 바로 필립으로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죠.



앨리스와 안드레아스 그리고 둘의 다섯자녀들



올가 왕비의 막내는 아들인 크리스토포로스 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해군으로 자랐지만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해군 업무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복잡한 정치 상황에 아버지나 형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본 그는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듯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1914년 미국 출신의 상속녀이자 과부였던 낸시 리즈와 약혼합니다. 낸시는 크리스토포로스보다 10살이나 더 많았지만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오랜 약혼후에 1920년 그녀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내는 암으로 사망했고 아내가 아프게 되자 크리스토포로스는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녔고 낸시가 죽었을때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와 아나스타샤 왕자비 


첫아내가 죽은 6년후 그는 프랑수아즈 도를레앙과 재혼합니다. 프랑수아즈 도를레앙의 고모였던 마리 도를레앙은 크리스토포로스의 숙부였던 덴마크의 발데마르 왕자의 아내이기도 했었죠.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에게는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미하엘 왕자만이 있습니다. 미하엘이 태어난 직후 크리스토포로스가 사망했으며 미하엘이 10대일때 어머니마저 사망했기에 미하엘은 프랑스에 있던 외삼촌인 파리 백작 앙리의 영향하에서 성장합니다. 미하엘은 평민과 결혼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가 즉위한뒤 그의 결혼을 인정해주면서 자녀들 역시 왕족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 상황은 복잡한 이탈리아 왕가의 수장 자리를 둔 다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미하엘의 딸인 올가는 아오스타 공작의 후계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둠으로써 올가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이탈리아 왕가의 수장자리가 돌아갈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미하엘은 작가로도 유명한데 그의 역사소설은 "소설"임에도 너무 사실인것처럼 이야기해서 비판받는 반면, 로마노프 가문의 보석등에 대한 책등을 매우 평이 좋습니다.



프랑수아즈 도를레앙

크리스토포로스의 두번째 아내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안드레아스 왕자 가족사진은 구글 검색..ㅠ.ㅠ(오래전에 저장해둔 사진이라 링크가 기억이 안나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