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원치않게 글이 길어졌는데 뭐 앨리스 왕자비 전기 읽으면서 읽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0-;;;
휴고 비커스가 책에 어찌나 많은 내용을 담아놨던지 말입니다. -0-;;;;;
[새해특집] 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15) 올가 왕비의 자녀들과 후손들:첫번째
올가 왕비는 게오르기오스 1세와의 사이에서 모두 여덟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다섯 딸 셋을 낳았는데 이중 막내딸이었던 올가는 유아기를 못 넘기고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아이들은 모두 성인으로 성장했었습니다.
올가 왕비의 자녀들
위의 다섯아이들, 안드레아스 왕자와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아직 없던때인듯합니다.
올가 왕비의 첫째아이는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입니다. "티노"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가족내에서는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독일의 공주였던 조피(소피아)와 결혼했는데 이때쯤 여왕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티노의 장모)사이에 오간 편지에서 티노가 그리 영리한 인물은 아니지만 매우 좋은 사람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역시 복잡한 그리스 상황에 휘둘렸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역시 그리스의 성급한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쓰라린 패배는 물론 패전의 책임까지 져야했습니다. 하지만 1차발칸전쟁 당시에는 개선장군으로 환영받았으며, 즉위시에는 "콘스탄티노스와 소피아의 통치"에 대한 구전전설때문에 매우 열광적 지지를 얻기도 했었죠. 하지만 그는 아버지인 게오르기오스 1세보다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특히 베니젤로스를 적으로 돌리므로써 그리스 내에서 입지가 엄청나게 약해졌으며, 특히 1차대전때 중립으로 있으려 했기에 결국 망명길에 올랐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다시 복위하긴했지만 역시 소아시아 침공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시 망명해야했고 망명직후 사망했었습니다.
콘스틴티노스의 아내인 소피아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셋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오빠인 빌헬름 2세와 사이가 나빴는데 아마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것입니다. 독일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영국식으로 성장했으며 어머니 빅토리아가 아낀 세딸중 하나였죠. 그리스에서 소피아는 이전의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경헙합니다. 그리스의 열악한 환경이나 이해할수 없는 정치 시스템등은 소피아를 힘들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그녀는 그리스 왕가 사람으로 그리스를 위한 행동을 했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그리스와 사이가 나쁜 독일 출신(독일은 터키를 지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습니다.)이었기에 경계했었으며 특히 1차대전 당시 그리스 상황에서는 매우 비난받았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1세와 소피아 왕비 그리고 둘의 아이들, 막내인 예카테리니는 아직 태어나기 전인듯합니다.
콘스탄티노스와 소피아 왕비 사이에서는 모두 여섯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세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이 태어나는데 세명의 아들들은 모두 그리스의 국왕이 되었죠.
콘스탄티노스가 1차대전때 퇴위한뒤 차남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게오르기오스가 독일에서 공부했었기에 친독일 성향이 있다고 판단됐으며 이때문에 베니젤로스는 둘째였던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이 되길 원해다고 합니다. 20대에 갑작스럽게 국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정치적으로 베니젤로스에게 의존할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그에 대해서 "베니젤로스의 꼭두각시"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그의 사망은 콘스탄티노스가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시절 친구이자 그리스 궁정 조신의 딸이었던 아스파시아 마노스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은 그리스 왕가는 물론 베니젤로스마저 탐탁치 않아한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때 아스파시아는 임신중이었죠. 한동안 아스파시아의 아이가 아들이면 왕위계승문제를 야기할수 있었기에 그리스 왕가에서 아스파시아에게 냉대를 했었습니다. 모두에게 다행히도 아스파시아의 아이는 딸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라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딸이 태어난뒤 그리스 왕가 사람들은 아스파시아와 알렉산드라를 왕실 가족으로 인정해줬습니다. 알렉산드라는 후에 유고슬라비아의 국왕이었던 페타르와 결혼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와 아스파시아 마노스
콘스탄티노스의 장남인 게오르기오스는 아버지가 두번째 양위한뒤 국왕이 되었습니다만 왕실을 지지하던 세력의 쿠데타가 실패한뒤 그 역시 결국 그리스 왕위에서 물러나야했습니다. 그리스에서 퇴위한뒤 그는 처가인 루마니아에서 지냈는데 이 상황은 부부사이를 악화시켰었습니다. 1935년 다시 복위했으며 이후 그리스 국왕으로 지냈습니다. 특히 2차대전이 일어났을때 그리스가 독일에 항복하길 거부하고 동생인 파울로스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었으며 2차대전후 다시 복위합니다. 하지만 그는 1935년 아내와 이혼한뒤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지냈으며 후손이 없었기에 왕위는 동생인 파울로스에게 돌아가죠.
게오르기오스는 루마니아의 공주였던 엘리사베트와 결혼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빅토리아여왕의 손녀이자 러시아의 황제 알레산드르 2세의 외손녀였던 에든버러의 마리였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오래도록 엘리사베트를 사랑했었지만 엘리사베트는 그와의 결혼에 매우 관심이 없었지만 1차대전이후 혼처가 거의 없어지면서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매우 "떠받들여진 삶"에 익숙했던 엘리사베트는 시댁과의 마찰을 피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시어머니인 소피아왕비가 며느리를 그다지 예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양위한뒤 친정으로 돌아간 엘리사베타는 결국 게오르기오스와 멀어지게 되었으며 남편의 부관과 연애질을 했습니다. 결국 남편이 복위하기 직전인 1935년 9월경 이혼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 2세와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타
콘스탄티노스의 막내아들인 파울로스는 후계자가 없었으며 결국 결혼하지 않았던 형 게오르기오스의 뒤를 이어 그리스의 국왕이 됩니다. 그는 형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에 저항운동을 펼쳤었죠. 2차대전 이후 그리스로 돌아왔으며 형의 뒤를 이어 그리스의 국왕이 됩니다 역시 그의 치세에도 매우 그리스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내전까지 치뤘던 그리스의 내부문제를 봉합하는 것과 더불어 여전히 영토 문쟁중이었던 여러곳에 대한 정치적 고려도 해야했습니다. 그는 다른 많은 그리스 왕가 사람들처럼 매우 쾌활한 사람이자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만 그의 아내인 프레데리카는 그에게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었습니다.
파울로스는 친척관계였던 하노버의 프레데리케와 결혼했습니다. 프레데리카의 어머니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는 독일의 빌헬름 2세의 딸로 파울로스와는 사촌관계였었습니다. 게다가 프레데리카의 할머니는 덴마크의 티라로 파울로스의 할아버지였던 게오르기오스 1세의 동생이기도 했었죠. 프레데리카는 웃는 모습이 매우 매력적인 여성으로 왕족으로써 해야할 의무를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 내전 당시 왕실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더불어 그녀에 대한 반대감정역시 커지게 됩니다. 그녀는 어쨌든 그리스의 오랜 적이었던 독일 출신이었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의 정치적 개입에 대해서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죠.
파울로스와 프레데리카
현재 그리스는 공화국입니다. 파울로스가 죽은뒤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가 그리스 국왕으로 즉위했었죠. 잘생긴 외모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뛰어난 스포츠맨이었던 콘스탄티노스는 국왕이 되기전 아마도 사랑받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친척이었던 덴마크의 앤 마리와 사랑에 빠져서 동화같은 결혼을 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그리스 정치 상황은 그를 그리스 국왕으로 놔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국왕이 호감을 얻지 못했던 국왕의 어머니 프레데리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여겼었죠. 실제로도 그랬는데 이런 상황은 결국 그리스 내에서 왕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게 되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0년대 쿠데타가 콘스탄티노스 2세를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쿠데타세력을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는데 이 상황은 콘스탄티노스가 입헌상황을 해치는 상황을 묵인했다는 생각을 퍼져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는 국왕 지위에서 물러나야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오랜 망명생활을 했지만 2013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로 돌아갔습니다.
2015년 콘스탄티노스와 앤 마리
http://www.thetimes.co.uk/tto/news/world/europe/article4340023.ece
콘스탄티노스의 큰딸인 엘레니(헬렌)은 루마니아의 왕위계승자였던 카롤과 결혼합니다. 그녀의 올케였던 엘리사베타는 카롤의 동생이었죠. 하지만 엘레니와 카롤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으며 둘은 이혼으로 끝나게 됩니다. 둘사이에는 아들인 미하이가 있었죠. 카롤은 아버지에 의해서 왕위계승권이 배제당한채 추방당했는데 어린 미하이가 즉위한뒤 다시 돌아왔고 아들대신 국왕이 됩니다. 하지만 2차대전중 카롤은 루마니아에서 쫓겨났는데 이때 한재산 챙겨서 정부였던 마그다 루페스쿠와 함께 해외로 갔습니다. 미하이는 다시 국왕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못만나게 했던 어머니 엘레니와 함께 했었죠. 미하이 역시 2차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가 공산화 되면서 국왕에서 물러났었습니다. 현재 미하이는 루마니아로 돌아갔으며, 루마니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카롤과 헬렌
안 맞는 사람들이 결혼하면 얼마나 불행할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죠.
특히 안맞는데다가 남자가 나쁜넘이면 여자가 얼마나 불행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콘스탄티노스의 둘째딸인 이리니는 사보이 공작 가문의 방계 가문으로 이탈리아 왕가의 방계 가문이었던 아오스타 공작인 아이모네와 결혼했습니다. 아이모네는 크로아티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국왕이 되지는 못했었습니다. 현재 아오스타 공작 가문의 수장은 이리니의 아들이며, 이니리의 손자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아마도 이탈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할수 있는 사보이 공작가문의 수장이 될듯합니다.
이리니와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
콘스틴티노스의 막내딸은 예카테리니였습니다. 그녀는 큰오빠인 게오르기오스와 23살이나 차이났으며 이때문에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은 그녀에게 오빠들은 거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결혼하지 않고 지냈던 그녀는 2차대전중 만난 영국 장교인 리처드 브랜드램과 결혼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막내여동생의 결혼에 매우 기뻐했지만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는데 아마도 늦은 결혼이었기에 애도 기간에 구애받지 않으려했던듯합니다. 예카테리니는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조용히 살았었습니다. 조지 6세는 예카테리니가 영국에서 "공작의 딸"과 같은 예우를 받게 해줬으며 예카테리니는 영국에서 "레이디 캐서린 브랜드램"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예카테리니 공주
레이디 캐서린 브랜드램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http://www.thetimes.co.uk/tto/news/world/europe/article4340023.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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