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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인판타들...(10)인판타 카타리나 : 가톨릭 공동 군주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5. 12.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줄이니까 너무 줄여지는군요..-0-;;;;


에스파냐의 인판타들...(10)인판타 카타리나 : 가톨릭 공동 군주의 딸(두번째)



인판타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of Aragon)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잉글랜드에서 "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카타리나는 과부가 된뒤 그녀의 처지는 좀 애매하게 변합니다. 헨리 7세는 캐서린을 놓아줄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그녀의 지참금때문이었죠. 캐서린은 결혼할때 이십만 크라운의 돈을 지참금으로 받았는데 결혼식 직후 십만크라운이 잉글랜드로 왔습니다. 캐서린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이 돈을 토해내야하는데 헨리 7세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하나는 아마도 어렵게 잡은 외국 동맹을 놓치는 것이 아까워서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헨리 7세는 캐서린을 돌려보내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고, 아서의 동생인 요크 공작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제안하게 됩니다. 헨리는 캐서린보다 다섯살이나 어렸기에 결혼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죠. 


이 상황이 더 복잡해진것은 헨리 7세의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1503년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면서입니다. 가톨릭 공동군주는 헨리 7세가 자신들의 딸과 재혼하려하는것이 아닐가 걱정해야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캐서린의 시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7세


1504년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이 사망하면서 캐서린의 지위는 좀더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캐서린은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으며 헨리 7세는 며느리에게 필요한 돈을 제때 주지 않아서 캐서린은 아버지에게 불평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1509년 아서가 죽은 7년뒤 캐서린은 열여덟살의 시동생이자 막 왕위를 이어받은 헨리 8세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은 교회법상 문제가 되는데 "형수"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성경의 말씀때문이었죠. 캐서린은 아서와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라고 맹세했고 이를 근거로 아서와 캐서린의 결혼은 무효라는 결론으로 결혼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 문제가 되죠.



즉위 할 무렵의 헨리 8세



결혼후 캐서린은 모두 여섯번 임신합니다만 살아서 성인이 된 아이는 딸인 메리밖에 없었습니다.


캐서린은 결혼후 왕비로써 최선을 다해 의무를 수행했습니다. 남편이 전장에 나갈때면 섭정으로 봉사했고 국왕부재시 스코틀랜드와 전쟁이 일어나자 스스로 갑옷을 입고 군대앞에서 연설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캐서린은 자신이 교육받은대로 딸인 메리를 교육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녀에게 이제 자녀는 메리밖에 없을것이었기 때문에 메리가 왕위계승자가 될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헨리 8세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남성후계자를 원하게 되죠. 그가 남성후계자를 원하게 된것은 정치적문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튜더가문은 여전히 적통 왕가가 아니었으며 여성후계자였던 마틸다 황후가 잉글랜드에서 오랜 내전을 했던것을 생각해보면 메리의 즉위는 내전을 불러올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의 딸 메리


하지만 캐서린은 헨리의 왕비였으며 그녀의 조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기에 헨리가 아들을 원한다고 해도 메리가 왕위계승자가 될것처럼 보였습니다. 앤 불린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