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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인판타들...(5) 인판타 후아나 : 가톨릭 공동 군주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5. 11.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어딘가 찾아보면 후아나의 삶에 대한 글이 있거든요.

그런데 읽기가 싫어요..ㅠ.ㅠ

요즘 좀 날로 먹어요...흑


에스파냐의 인판타들...(5) 인판타 후아나 : 가톨릭 공동 군주의 딸(두번째)




판타 후아나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

에스파냐의 여왕

"후아나 라 로카"

Joanna (6 November 1479 – 12 April 1555), 

Joanna the Mad (Spanish: Juana la Loca)

부르고뉴 쪽 복장을 입은 모습

시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저 비슷한 옷을 입은 초상화가 있죠.



후아나와 필립은 처음 만났을때 서로에게 반했었다고 합니다. 특히 후아나는 자신의 오빠나 언니처럼 자신의 배우자를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죠. 하지만 필립의 관심은 곧 식게 되는데 이런 상황은 후아나가 남편이 관심을 가지는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매우 질투어린 행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후아나의 질투어린 행동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었죠.



필립과 후아나


후아나가 결혼한 다음해에 후아나의 오빠인 후안이 후계자없이 사망합니다. 그가 죽으면서 이제 왕위계승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후아나에게는 언니인 이사벨이 있었으며 그녀와 그녀의 후손들이 후아나보다 계승권에서 우선순위가 있었습니다. 1498년 후아나의 언니인 이사벨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합니다. 아이는 아들이인 미구엘이었으며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과 시칠리의 계승권을 가지게 되죠. 게다가 포르투갈 국왕의 아들이었기에 그 아이가 무사히 성인으로 성장한다면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마누엘이 태어난 3달후에 후아나 역시 아이를 낳습니다만 딸인 레오노르였습니다. 아라곤에서 "여성 계승권"을 인정하지만 남성 후계자가 있을 경우 인정한다는 조건을 달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계승권은 그대로 포르투갈쪽으로 넘어가는듯 보이게 되죠.



딸 레오노르


1500년 2월 후아나는 후계자가 될 아들인 카를(카를로스)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조카였던 마누엘이 2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계승권은 자연히 이제 후아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유력해지게 됩니다. 필립은 아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내가 아스투리아스 여공 칭호를 얻는것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후아나는 바로 임신을 했고 이때문에 바로 에스파냐로 갈수가 없었습니다. 후아나는 1501년 딸인 이사벨을 낳습니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의 이름을 딴것이었죠. 아이를 낳은뒤 후아나와 필립은 에스파냐로 갑니다. 그리고 1502년 후아나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후계자로 "아스투리아스 여공"칭호를 얻게 되죠. 하지만 아라곤은 좀 문제가 있는데 당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완전히 합병된것이 아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카를로스


1503년 필립은 아내를 남겨두고 플랑드르로 돌아갑니다. 이때 후아나는 임신중이었으며 아들인 페르디난트(페르난도)를 낳았죠. 이런 상황은 아마도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였을듯한데, 아내의 질투심을 견디기 힘들었기에 잠시 아내를 떼어둔것도 있었을 것이며, 또 임신중인 후아나가 여행하는 것도 무리였을듯합니다 게다가 이제 후아나는 에스파냐의 후계자였기에 그녀가 나라를 떠나는 것은 왕위계승에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일이기도 했었을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떠난뒤 후아나는 우울해했으며 플랑드르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후아나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은 정치적 문제때문에 딸이 에스파냐에 머물길 바랬지만 결국 1504년 6월 후아나는 플랑드르로 돌아가게 되죠. 플랑드르로 돌아간뒤에도 후아나는 남편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냈는데, 이때 후아나가 정신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해서 남편인 필립에 의해서 감금당했다는 소문이 돌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필립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판단력이 흐린 아내"를 대신해서 통치한다는 명분을 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아나의 남편 필립

부르고뉴 공작


1504년 11월 후아나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인 이사벨이 사망합니다. 이제 후아나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이 되죠. 하지만 이 상황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태를 야기시킵니다. 후아나가 여왕이 되면서 그녀의 남편인 필립이 공동 국왕이 되었죠. 그리고 후아나의 아버지였던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지위를 잃고 단지 딸과 외손자의 "섭정"지위로 물러나야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난도 2세는 이를 거부했으며 딸과 함께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 지위를 이어가려했죠. 이런 상황은 후아나의 남편인 필립의 반발을 가져옵니다. 그는 아내의 권리를 통해 자신이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었죠. 


정치적으로 이렇게 복잡하게 되자, 페르난도는 합스부르크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친프랑스 노선을 선책하게 됩니다 .그는 루이 13세의 조카이자 역시 자신의 여동생의 손녀였던 제르멩 드 푸아와 재혼해서 후계자를 얻으려합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아라곤의 왕위는 딸과 사위가 아니라 아들에게 물려줄수 있으며, 역시 같은 가문이었기에 자신의 아들이 카스티야도 물려받을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죠.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

아라곤과 시칠리의 국왕

가톨릭 공동 군주


필립은 이제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아내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려한것이었죠. 사실 이사벨 여왕이 사망했을때 바로 떠날수 없었던 것은 후아나가 다시 임신중이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후아나는 1505년 딸인 마리아를 낳았으며 딸이 태어난뒤 남편과 함께 카스티야로 가죠. 필립은 카스티야 귀족들을 규합해서 장인에게 대항하려 했습니다만 결국 장인과 협정을 맺게 되죠. 여기서 필립과 페르난도는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후아나를 정치에서 배제합니다. 이유는 그녀가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통치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죠.  그리고 결국 필립이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둬서 아내와 함께 카스티야의 공동국왕이자 카스티야의 통치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펠리페와 후아나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