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51) 마무리 : 에스파냐 계승이야기

엘아라 2015. 9. 2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이제 뭐해야할까요..ㅠ.ㅠ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51) 마무리: 에스파냐 계승이야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공"칭호를 쓴것은 오래되었지만 정식으로 인정된것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이자 이후 황제 지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독점하기 시작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때였다고 합니다.

이때 이후 딸들에게는 모두 "여대공"칭호가 부여되기 시작했었죠.


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고뉴의 상속녀였던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고, 둘의 아들이었던 필립(미남왕)이 에스파냐의 상속녀가 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스파냐와 그에 따른 신대륙의 넓은 신민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었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에스파냐에서는 카를로스 1세)는 결국 이 제국을 한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줍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로 나뉘게 된것이었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

제국을 통치하기 힘들었던 카를 5세는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령을 몽땅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포함하는 독일 지역은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줬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늘 정략결혼으로 가문을 지켜나가는 전통이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복잡한 근친결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에스파냐 합스부르크는 좀더 복잡한 관계였는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여성의 계승권을 배제했던 반면 에스파냐는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했기에 에스파냐쪽 여대공들의 정략결혼이 훨씬더 심했었습니다. 게다가 에스파냐쪽 남성 계승자들이 별로 남지 않게 되면서 이런 상황은 더 심해지게 됩니다. 가문에서 에스파냐를 잃지 않기 위해 계승권을 가진 중요한 딸들은 오스트리아쪽으로 자주 시집가게 되죠. 반대로 오스트리아쪽에서는 에스파냐와의 동맹을 위해 딸들을 시집보내게 됩니다. 비록 같은 가문이긴 했지만 다스리는 지역이 달랐고 이런 상황은 두 가문 사이가 미묘한 관계가 자주 되게 했는데 이런 껄끄러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결혼동맹이기도 했었죠. 



오스트리아의 안나

펠리페 2세의 조카이자 네번째 아내


에스파냐는 가까운 프랑스와 자주 통혼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자주 경쟁관계였을뿐아니라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에스파냐와 프랑스간의 껄끄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동맹이 필요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죠. 특히 펠리페 4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 부르봉 가문에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가져오게 됩니다. 펠리페 4세의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남동생 다음으로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죠. 결혼식때 지참금을 받는대신 계승권을 포기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에스파냐는 그 지참금을 다줄 능력이 없었고, 결국 마리아 테레사의 남편인 루이 14세는 아들과 손자들의 에스파냐 계승권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앙리 2세의 딸

펠리페 2세의 세번째 부인



오랜 근친결혼으로 남성후계자가 남아나지 않게 된것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오폴트 1세때 주변 방계 가문의 남성직계는 남아나지 않았으며 레오폴트 1세 역시 형제들 모두 미혼으로 사망했었죠. 이런 상황은 결국 레오폴트 1세에게 두 아들이 태어나면서 해결됩니다만 에스파냐 계승문제에는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카를로스 2세에게 후계자가 없을경우 누이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고모들과 그 후손들에게 계승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카를로스 2세의 고모들중 프랑스로 시집간 아나(안 왕비)는 계승권을 포기했었고, 오스트리아로 시집간 마리아나의 후손들에게 계승권이 있었죠. 또 누이들중에 프랑스로 시집간 마리아 테레사는 지참금을 받는 대신 계승권을 포기했고,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후손들에게 계승권이 있었죠.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

에스파냐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남성 직계 후계자



결국 이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고모 마리아나의 아들인 레오폴트 1세의 후손들이었는데 레오폴트 1세의 첫번째 아내인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낳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이 가장 유력한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이에른의 선제후와 결혼해서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낳은 얼마뒤 사망했고 결국 살아남은 아들이었던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가장 강력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자였죠. 그가 살아있었을땐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그의 계승권을 인정했었습니다. 하지만 1699년 그가 사망하게 되자 에스파냐 계승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

아스투리아스 공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아내의 지참금을 덜 받았기에 결국 계승권을 인정받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그랑 도팽과 그랑 도팽의 세아들들의 계승권을 주장합니다. 특히 그랑도팽의 둘째아들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유력한 계승후보로 내세우게 되죠. 반면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레오폴트 1세의 둘째아들인 카를을 계승자로 내세우게 됩니다.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인 인판타 마리아나의 권리를 통해서 계승권을 주장하는 것이었죠. 정치적으로 좀 복잡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주변 국가들은 비록 당대에는 국력이 많이 약했지만 그래도 방대한 식민지를 가진 에스파냐가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어느 한국가에 귀속되는 것을 두려워했었습니다. 균형을 깰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잉글랜드 주도하에서 에스파냐의 영지를 나누어서 상속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상황이 되자 에스파냐측에서는 에스파냐의 영지가 나뉘는것을 반대했고 결국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죽기전 에스파냐를 분할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프랑스의 앙주 공작에게 모든 영지를 상속하기로 결정하죠.


이런 상황은 결국 프랑스가 앙주 공작을 에스파냐의 상속자로 "펠리페 5세"라고 주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상황은 서로 경쟁관계였던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마찰이 심해지면서 더 문제가 됩니다. 결국 잉글랜드는 에스파냐 국왕으로 레오폴트 1세의 둘째아들인 카를을 지지하면서 에스파냐 계승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손자 앙주 공작 필립을 에스파냐의 국왕으로 소개하는 루이 14세



하지만 카를의 형인 요제프가 죽고 카를이 황제 카를 6세가 되면서 다시 한번 반전이 됩니다. 결국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는 펠리페 5세가 가지게 됩니다만, 이탈리아와 저지주들은 오스트리아쪽에 돌아가게 되었고 이렇게 에스파냐의 왕가는 합스부르크가문에서 부르봉 가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 에스파냐 국왕 역시 이 부르봉 가문의 후손이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도 결국 카를 6세때 남성직계가 단절됩니다. 그리고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상속받게 됩니다만 이 문제는 다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렌 가문 출신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낳았었죠.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이 현재도 오스트리아 대공/여대공의 지위를 쓰고 있습니다.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둘의 아이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