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7)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 펠리페 4세의 딸 (첫번째)

엘아라 2015. 9.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드디어 에스파냐-합스부르크도 끝입니다.

이제 합스부르크가의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이게 합스부르크 가문을 파야하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중세로 가면 여성들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말입니다.

진짜 보면 가족관계로 글을 써야하거든요.(물론 몇몇글도 이미 그렇습니다만..)


하여튼 고민입니다.-0-;;;

이참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열심히 파헤쳐볼까 싶기도 합니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가 그다지 관심 가지지 않는 가문이라...전 좀더 작은 가문이 좋거든요.-0-;;;;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7)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 펠리페 4세의 딸 (첫번째)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에스파냐의 공주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왕비

루이 14세의 왕비

Maria Theresa of Spain 

(María TeresaMarie-Thérèse)

(10 September 1638 – 30 July 1683)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


후에 프랑스로 가서 "마리 테레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1638년 마드리드 근처의 궁전중 하나인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펠리페 4세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3세와 그의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위로는 누나인 아나가 있었는데 어려서 어머니가 일찍 죽자 누나인 아나가 동생들을 돌봤기에 펠리페 4세는 누나인 아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펠리페 4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였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와 그의 두번재 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딸이었죠.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동맹을 위한 정치적인 것으로 펠리페의 누나인 아나와 엘리자베트의 오빠인 루이 13세 역시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결혼했었죠.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에스파냐에서는 이사벨로 불림)는 정략결혼이었기에 행복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펠리페 4세의 복잡한 여자 문제 역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에스파냐의 이사벨 왕비

역시 벨라스케스 작품인가??(아마 맞을듯-0-;;)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는 모두 여덟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중에서 유아기를 넘긴 아이는 아들인 발타자르 카를로스와 마리아 테레사 밖에 없었죠.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1644년 사망합니다. 이때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10대 중반이었으며, 마리아 테레사는 겨우 여섯살 무렵이었죠. 아마도 펠리페 4세는 후계자인 아들이 있었기에 재혼할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했을듯합니다. 그리고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역시 사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약혼중이었었죠.


발타자르 카를로스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바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의 작품

마소는 벨라스케스의 사위로 그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대 벨라스케스 그림중 상당부분은 마소가 대신 완성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646년 발타자르 카를로스가 사망하면서 왕위계승은 좀 복잡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펠리페 4세는 남성후계자를 잃었으며 이제 재혼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죠. 결국 그는 자신의 조카이자 아들의 약혼녀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1649년 열다섯살도 안된 마리아나와 펠리페 4세는 결혼합니다. 

마리아 테레사와 마리아나는 겨우 네살차이로 둘은 "어머니-딸"이라기 보다는 마치 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마리아나가 사촌이자 의붓딸이 된 마리아 테레사에게 "어머니"로써 행동하기 어려웠을듯합니다.


마리아 테레사의 새어머니이자 사촌이었던 마리아나



마리아 테레사는 엄격한 가톨릭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엄격한 에스파냐 궁정예법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다양한 방면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이런 상황은 후에 그녀가 프랑스로 가서 "구닥다리"라고 비웃음사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오빠인 발타자르 카를로스가 죽은뒤 마리아 테레사는 "여성 상속"이 인정되는 에스파냐의 추정왕위계승자가 됩니다.그리고 남동생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게 되죠. 마리아 테레사는 에스파냐 왕위계승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이때문에 여러명과 혼담이 진행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에스파냐를 잃지 않기 위해 마리아 테레사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자와의 혼담이 다시한번 추진됩니다. 사촌이자 황제의 장남이었던 페르디난트가 처음 혼담 대상이었으며 그가 죽은뒤에는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가 혼담대상이 되었죠.



마리아 테레사의 사촌

황제 레오폴트 1세



하지만 마리아 테레사의 운명은 합스부르크쪽 사촌이 아니었습니다.


1658년 프랑스는 전쟁중이었던 에스파냐와의 평화 협정을 고려하게 됩니다. 이 평화협정의 중심에는 펠리페 4세의 누나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였던 안 왕비가 있었죠. 반 합스부르크를 표방했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30년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런 상황은 에스파냐와 프랑스간의 오랜 전쟁을 지속하게 했습니다. 리슐리외의 뒤를 이은 재상이자 안 왕비가 절대적으로 신뢰했었던 마자랭 추기경 역시 리슐리외 추기경의 반 합스부르크 정책을 이어받았었죠. 어쨌든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와 에스파냐간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었는데 1658년경에 에스파냐의 결정적 패배는 결국 평화협상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평화 협정의 대부분은 결혼동맹으로 끝나는 것이었고 안 왕비는 조카를 며느리로 들이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물론 마자랭 역시 이를 지지합니다만, 마리아 테레사는 매우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좀더 유리한 조건을 위해 루이 14세의 신부후보로 마리아 테레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염두에 둔것처럼 행동해서 에스파냐쪽에서 도리어 적극적으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카이자 며느리인 마리 테레즈와 함께 있는 안 왕비


어쨋든 1659년 피레네 조약을 통해서 마리아 테레사는 사촌인 루이 14세와 결혼하기로 결정됩니다.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지참금"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마리아 테레사가 에스파냐의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으며 프랑스측은 이를 강조했고 에스파냐 역시 중요한 왕위계승자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엄청난 지참금을 주기로 약속하죠. 하지만 이때쯤 에스파냐는 마리아 테레사의 지참금을 프랑스 측에 줄 능력이 없었으며 이 상황은 후에 에스파냐 계승전쟁이 일어났을때 루이 14세가 지참금을 다 못받았기에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피레네 조약으로 딸을 조카에게 넘기는 펠리페 4세-0-;;;



1660년 펠리페 4세는 딸인 마리아 테레사를 데리고 조카이자 사위가 될 루이 14세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1660년 6월 7일 마리아 테레사는 에스파냐 땅을 떠났으며 6월 9일 루이 14세와 결혼해서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왕비가 됩니다.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결혼


자료출처

1.위키피디어

2.다음 카페 로얄하우스(http://cafe.daum.net/yulia0818)중 데크만님의 글"사랑과 루이 14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