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결국 네개입니다..ㅠ.ㅠ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5) 인판타 아나 : 펠리페 3세의 딸(네번째)
에스파냐의 인판타 아나
프랑스의 안 왕비
안 도트리슈
Anne of Austria
(22 September 1601 – 20 January 1666)
안 왕비는 남편이 죽은뒤 마자랭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섭정단에서 배제하는 남편의 유언을 무효로 돌리고 아들의 섭정이 됩니다. 지금의 안 왕비는 14살에 시집와서 어리숙했고 주변 인물들에게 휩쓸리던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그시절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섭정이 된 안은 자신의 젊은 시절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정치적으로 성공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도운 인물이 바로 마자랭이었죠. 이때문에 안 왕비가 마자랭과 비밀결혼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젊은시절 수많은 음모등에 시달렸던 안 왕비가 아들에게 정치적으로 치명적일수 있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그리고 마자랭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사도 문학"에 나오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해 한없이 희생하는 남자를 두는것이야 말로 모든 여성의 꿈 아니겠습니까 -0-;;;;; (물론 마자랭은 덕분에 권력을 장악하고 말입니다.)
마자랭 추기경
섭정으로써 안 왕비는 매우 좋은 섭정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어머니들이 그랬던것처럼 그녀는 아들에게 안전하고 통치하기 좋은 나라를 돌려주길 바랬을것입니다. 안 왕비가 섭정이던 시절 그녀는 마자랭의 충고를 따랐는데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반 합스부르크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를 적으로 생각했었죠. 안 왕비는 동생인 펠리페 4세와 매우 사이가 좋았음에도 이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죠. 어린 국왕이 즉위하자 마자랭등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의회가 결국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를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진압하지만 곧 마자랭과 귀족들이 반목하면서 이번에는 귀족들이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에는 국왕쪽에 나쁘게 돌아갔지만 점차 루이14세측이 우세해졌으며 특히 1651년 루이가 친정을 시작할수 있는 나이가 되자 명분을 귀족들이 명분을 상실하게 되면서 결국 난은 끝났으며 이 결과 귀족권력이 약화되면서 "태양왕 루이"라고 불렸던 절대왕정의 루이 14세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는것이었죠.
제우스로 묘사된 루이 14세
저기 밟고 있는 방패가 프롱드의 난을 평정한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안 왕비는 아들이 친정을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궁정에서은퇴하지 않고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살았었습니다. 특히 1659년 에스파냐와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면서 에스파냐와의 평화를 위해 조카였던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를 며느리로 데려오는데 관여하죠.
며느리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와 함께 있는 안 왕비
예전에 이그림이 평화 조약의 상징으로 마리 테레즈 왕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대나 그랬던듯합니다.
안 왕비는 궁정에서 지냈지만 곧 자신이 궁정에서 은퇴해야한다고 생각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고, 후계자가 될 손자 루이(후에 그랑도팽)이 태어나는 것을 본 안 왕비는 궁정에서 떠나 수녀원으로 은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년후 유방암으로 수녀원에서 사망했었습니다.
그랑 도팽과 며느리 마리 테레즈와 함께 있는 안 왕비
안 왕비는 결혼후 네번의 유산을 겪은뒤 두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루이 14세와 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였죠. 재미난 사실은 오를레앙 공작의 "여성스러운 성격"이 어머니인 안 왕비에 의해서 형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이 14세는 국왕으로 모든 이들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인 필리프는 형에게 늘 복종하는 자세를 취해야했으며 이런 성향을 위해 둘째아들이 여성스러움을 선호하는 것을 권장했다고도 알려져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과 시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사이의 불화를 보면서 아들들의 불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필리프는 실제로 아내(리젤로트)보다 보석을 더 좋아했고 리젤로트는 그냥 승마를 한반면 필리프는 승마하는동안 타지 않기 위해 여성들이 쓰던 가면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가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었던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전장에 나가는것을 열망했고 실제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야망을 품는것을 원치 않았던 루이 14세는 동생에게 더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필리프는 그에 순응하는 동생이었구요.
안 왕비의 둘째아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 다음카페 로열하우스중 어떤글인데 기억이 안남..ㅠ.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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