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인판타 마리아 아나는 사실 어디선가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후거든요. 사촌인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런데 일찍 죽어서 그런지 자료가 적군요..ㅠ.ㅠ 언니처럼 시집을 일찍간것도 아니고 적이었던 프랑스가 아니라 사촌이랑 결혼해서 평온하게 산듯하네요. 아들이 레오폴트 1세인것만 빼면 그닥 할 이야기가..ㅠ.ㅠ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6)인판타 마리아 아나 : 펠리페 3세의 딸
에스파냐의 인판타 마리아 아나
신성로마제국의 마리아 안나 황후
Maria Anna of Spain
(18 August 1606 – 13 May 1646)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
인판타 마리아 아나는 1606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3세와 그의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타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펠리페 3세와 마르가레타의 사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모두 네명으로 마리아 아나의 언니이자 프랑스 왕비가 되는 아나, 오빠이자 에스파냐 국왕이 되는 펠리페 4세,그리고 마리아 아나의 남동생으로 "추기경-인판테"라고 불렸던 페르난도가 있습니다. 페르난도는 명칭대로 추기경으로 성직자로 살았었습니다. (.아무리 줄 영지가 없어도 그렇지 페르난도를 결혼시켰으면 에스파냐쪽 후계자가 그래도 좀 남았을텐데 말입니다.--;;)
마리아 아나의 부모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여대공
마리아 아나는 다섯살때 어머니인 마르가레타가 사망했으며 결국 마리아 아나를 돌본 사람은 언니인 아나 였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동생들은 아나에게 매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나의 언니
아나
안 도트리슈
1620년대초 마리아 아나에게도 혼담이 들어오게됩니다. 바로 영국 국왕의 후계자였던 웨일즈 공 찰스였죠. 찰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가톨릭교도 아내"를 맞길 원했었습니다. 그는 친한 사이였던 버킹엄 공작과 함께 에스파냐에 가서 인판타를 데려오려고 계획했었죠. 하지만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는데 마리아 아나는 신교도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며 찰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마음이 없었던것이죠. 웨일즈공의 에스파냐 방문은 성과가 없었으며 결국 찰스는 프랑스쪽 공주였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하게 되죠.
잉글랜드의 웨일즈공 찰스
찰스1세
1623년
이후 마리아 아나는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속을 위해 사촌이자 후계자였던 페르디난트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30년전쟁시기 마리아 아나의 언니인 아나가 프랑스로 시집갔지만 프랑스는 반 합스부르크 정책을 취했고 이런 상황은 위기 상황이었던 30년 전쟁시기에 합스부르크 가문끼리 결속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었을듯합니다.
페르디나트 대공
1620년대
마리아 아나는 결혼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지만 30년 전쟁 와중이었기에 그녀의 여행은 매우 위험했었다고 합니다. (잡혀서 인질이 될수도 있었을듯합니다.) 14개월에 걸친 여행끝에 1631년 1월 이탈리아에 안전한 곳에 도착한 마리아 아나는 그곳에서 대리혼을 치뤘고 다음달인 1631년 2월 사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과 결혼하게 됩니다. 30년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의 결혼이었기에 결혼식이후 한달간 축제가 계속 열렸었다고 합니다.
페르디난트와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아나와 페르디난트는 대부분의 정략결혼이 그렇듯이 열렬히 사랑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였다고 알려져있으며 사실 이런 결혼생활이 더 유지하기 쉬운 관계였죠. 마리아 아나는 밝고 행복해하는 성품에,지적이었으며 편안한 사람으로 자주 우울한 기분으로 빠져들던 남편의 기분을 풀어줄수 있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마리아 아나는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으며 남편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도 하게 됐다고 합니다. 또 남편이 궁정을 비울때면 전통대로 섭정으로써 궁정을 이끌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나의 남편
항제 페르디난트 3세
1640년대
역시나 미화임
30년 전쟁 시기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힘든 시기였는데 황실가족들은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다녀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마리아 아나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1646년 황실 가족들은 서둘러 린츠로 갔는데 이때 거의 산달이었던 마리아 아나에게는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5월 막내인 마리아를 제왕절개로 낳습니다만 아이와 산모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아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아나와 페르디난트 사이에서는 모두 여섯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중 세아이만이 영아기를 넘겨서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장남인 페르디난트는 젊은시절 미혼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딸이자 어머니와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마리아나"는 처음에는 사촌이었던 에스파냐의 인판테 발타자르와 약혼했지만 약혼자가 죽고 또 외숙모가 죽은뒤 외삼촌이었던 펠리페 4세와 결혼햇었습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레오폴트는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죠.
마리아 아나의 두 아이들
페르디난트와 마리아나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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