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9)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 : 펠리페 4세의 딸(첫번째)

엘아라 2015. 9.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저를 한동안 벨라스케스 그림에 미치게 만들었던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0-;;; 제가 푸른옷을 입은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을 보고 반해서 진짜 제가 볼수 있는 벨라스케스 화보집이란 화보집은 다 봤었는데 말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49)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 : 펠리페 4세의 딸(첫번째)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

에스파냐의 인판타

신성로마제국의 마르가레테 테레지아 황후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황후

Margaret Theresa of Spain 

(Margarita TeresaMargarete Theresia)

(12 July 1651 – 12 March 1673) 

푸른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



벨라스케스의 연작 초상화로 유명한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51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마리아나)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안나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의 아내인 인판타 마리아나의 딸로 태어났었죠. 그러니까 마리아 안나는 펠리페 4세의 조카였던 것입니다. 원래 마리아 안나는 펠리페 4세가 아니라 펠리페 4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발타자르 카를로스와 약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발타자르 카를로스가 갑자기 죽자 후계자가 필요했던 펠리페 4세는 재혼해야할 필요성이 생겼고 결국 정치적인 문제를 고려해서 아들의 약혼녀이자 조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와 재혼하게 된것이었죠.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안나는 나이차가 심했고 둘의 결혼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서 표현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위로는 언니 마리아 테레사가 있었는데 마리아 테레사는 마르가리타 테레사보다 10살이상 많았었죠. 아마 어린시절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언니 마리아 테레사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계승자이긴했지만 어쨌든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언니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시할수 없는 지위였을듯합니다. 

어린시절 매우 예쁜아이였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아버지 펠리페 4세의 사랑받던 딸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대로 정략결혼이 결정되게 됩니다.



3살 무렵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언니인 마리아 테레사는 어린시절 왕위계승권에 대한 고려로 인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갈것이 고려되었습니다. 하지만 1657년 남동생인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태어나면서 일단 남성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에스파냐가 어느정도 자유롭게 되고, 또 프랑스와의 전쟁상황이 바뀌면서 마리아 테레사는 합스부르크쪽 사촌이 아닌 프랑스쪽 사촌인 루이 14세와의 혼담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660년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죠.

하지만 1661년 남동생이자 후계자였던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사망하게 되자 펠리페 4세에게는 또 남성후계자가 없게 됩니다. 다행히 펠리페 프로스페로가 죽은 직후 아들인 카를로스가 태어났었긴했습니다. 하지만 펠리페 4세는 이 아들이 또 언제 죽을지 몰랐고 남성후계자가 없다면 에스파냐를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었죠.(마리아 테레사는 결혼하면서 지참금을 받고 계승권을 포기하기로 결정되어있었는데 문제는 이 지참금을 덜줘서.....후에 복잡한 문제가 되죠-0-;;;)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남동생

카를로스

후에 국왕 카를로스 2세


결국 이런 상황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를 잃지 않기 위해 다시한번더 정략결혼을 고려하게 만들었죠.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후계자였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에스파냐의 추정상속계승자가 될수도 있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혼담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레오폴트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나 왕비의 남동생으로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외삼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심한 근친결혼관계는 순전히 상속문제와에스파냐-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간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방편이기도 했었죠.(보면 에스파냐-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간에 이익을 두고 미묘한 관계가 자주 있어왔고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통적 "결혼동맹"형태를 자주 유지했었던것입니다. 결국 이런 관계는 남성후계자가 더 없었던 에스파냐쪽에 근친결혼이 더 심해지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0-;;;)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사촌이자 외삼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


1660년대 초반에 아마 혼담이 추진되었을 것이며 결국 1663년에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약혼이 공표되죠. 아마도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화는 자주 오스트리아로 보내졌을듯한데 일단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어머니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이기에 가족에게 보내는 초상화의 개념이 컸을듯합니다.  이후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황제의 혼담상대와 약혼자가 되면서 오스트리아로 그녀의 초상화가 정기적으로 보내졌을듯합니다. 이 일련의 초상화들은 바로 에스파냐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렸었죠. 벨라스케스는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로써 "실제 인물보다 더 실제처럼 그린다"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게다가 당대에는 어린이의 인물화 묘사 기법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었는데 벨라스케스의 어린이에 대한 묘사는 매우 탁월했었다고도 알려져있습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제가 예전에 읽었던 글에서는 이 초상화의 마무리 작업을 벨라스케스가 아니라 사위인 마소가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색감이나 그림이 전형적인 벨라스케스 그림이랑 좀 다르다고 ....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