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46) 프랑스의 이사벨 : 에드워드 2세의 왕비(여덟번째)

엘아라 2015. 9.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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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왕비들...(46) 프랑스의 이사벨 : 에드워드 2세의 왕비(여덟번째)




프랑스의 이사벨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왕비

Isabella of France 

(1295 – 22 August 1358)

내전중 브리스톨을 공격중인 이사벨



권력을 잡은 직후 이사벨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엄청난 연금과 재산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연인이었던 로저 모티머를 지원하게 되죠. 그녀는 자신에게 부과된 엄청난 재산을 통해서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녀의 취향에 맞는 삶이었죠. 1328년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예정된 대로 에노의 필리파와 결혼합니다만 이사벨은 섭정으로써 궁정에서 권한을 행사하죠. 그녀는 전통적으로 왕비들이 받아야하는 재산들에 대해서 며느리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이 여전히 가지고 재산을 행사합니다. 


이사벨의 섭정시기 외교적으로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야했습니다. 먼저 에드워드 2세 시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은 성과없이 패배의 연속이었으며 심지어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었죠. 이사벨은 스코틀랜드와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니다. 비록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해서 처음에는 반대했었지만 말입니다. 협정결과 이사벨의 딸인 조앤을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자인 데이비드 부르스(후에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에게 시집보내기로 했으며 에드워드 3세가 이후 스코틀랜드쪽 영토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기로 하죠. 이에 상응하는 댓가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제외한 적들에 대해서 군사적 원조를 해주기로 했으며 북부 영지를 손해본 귀족들을 위해 2만파운드에 해당하는 전쟁 배상금을 지급합니다. 하지만 북부영지를 손해본 귀족들은 이배상금을 받길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그 재산은 그대로 이사벨의 차지가 되었죠.스코틀랜드와의 평화협정은 정치적으로 매우 성공적인것이었습니다만, 불행히도 이것은 인기없는 정책이기도 했었습니다. 

또 그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던 가스코뉴 문제를 해결하려고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그녀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합니다만 이때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었던 아네주를 제외했었기에 이 협정 역시 잉글랜드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죠.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2세 그리고 타워의 조앤



하지만 권력자들간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랭카스터의 헨리는 로저 모티머와 불화를 했으며 이사벨은 헨리를 배제하기시작합니다. 또 헨리는 스코틀랜드와의 협정에 강하게 반발했었죠. 이런 상황은 랭카스터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다시 한번 이사벨과 로저 모티머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됩니다. 이사벨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들의 프랑스 왕위계승권리에 대한 주장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 의견에 대해서 거의 무시하고 있었으며 이사벨은 군대를 모을만한 재원이 부족했었죠. 이사벨은 아들인 존을 카스티야 왕가의 공주와 결혼시키면서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계승권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동시에 귀족들의 생각을 해외로 돌리려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1328년 말 잉글랜드는 다시한번 내전상태가 되죠. 랭카스터 백작은 이사벨과 모티머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는데, 모티머가 이끄는 이사벨의 군대가 이를 진압하게 됩니다. 이사벨 스스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아들과 함께 적들을 추격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자신에게 대항한 이들을 대부분 사면해줬었습니다. 하지만 랭카스터가 진압된 뒤에도 여전히 반기를 드는 인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켄트의 에드먼드(에드워드 2세의 이복동생)은 형이 죽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형의 복위를 꾀하게 되죠.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켄트 백작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되죠. 



랭카스터 백작 헨리의 씰


이런 상황은 아마도 에드워드3세에게는 부담이 되었을것입니다. 그는 숙부인 켄트 백작의 처형에 찬성하지 않았었지만 어쩔수없이 처형해야했죠. 결국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또한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모티머의 아이를 낳게 될 경우 발생할 문제 역시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던듯합니다. 1329년경 이사벨은 임신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상황은 에드워드에게 위기로 다가왔을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모았으며 기회를 노려서 모티머를 체포합니다. 모티머가 체포되었을때 이사벨은 아들에게 모티머를 구해달라고 사정했었다고 합니다. 이때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와 모티머로부터 권력을 뺏았고 친정을 시작하게 되죠. 


의회는 모티머의 재판을 시작했고, 이사벨은 모티머의 희생양으로 묘사되게 됩니다. 또한 이사벨과 모티머와의 관계는 대중에게는 감춰지게 되죠. 모티머는 결국 반역죄로 처형당하게 됩니다만 처형후 모욕적인 일을 당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모티머를 체포하는 에드워드 3세


모티머가 죽은후 이사벨은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었으며 이후 풀려나서 노퍽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티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사벨은 신경쇠약에 걸렸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권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부유했으며 수입도 엄청났었죠. 이런 재산을 가지고 이사벨은 거처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또 잉글랜드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지냈으며 후에는 협상을 위해 파리로 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나이가 들수록 막내딸인 조앤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특히 조앤이 바람둥이 남편 데이비드 2세의 곁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뒤 더했죠. 조앤 역시 어머니가 죽을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를 돌봤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손자들을 예뻐했는데 특히 장손이었던 에드워드(흑태자)를 매우 예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궁정에서 은퇴하지 않았고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위해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모티머의 딸이나 손자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자녀들과 함께 어머니를 자주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나이든후 이사벨은 신앙심이 깊어졌지만 아서왕 전설이나 보석등에 대한 흥미 역시 놓지 않았으며 매우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사벨은 점성술이나 지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죽기 직전 클레어 수녀회에 입회했으며, 죽은뒤에는 런던에 묻혔습니다. 이사벨은 결혼때 입은 맨틀에 쌓여서 남편 에드워드 2세의 심장과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