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41) 프랑스의 이사벨 : 에드워드 2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5. 8. 2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저도 앨리슨 위어가 쓴 이사벨 왕비 전기 읽고 싶어요..

한글 번역판으로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41) 프랑스의 이사벨 : 에드워드 2세의 왕비(세번째)




프랑스의 이사벨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왕비

Isabella of France 

(1295 – 22 August 1358)


피어스 개버스턴의 문제는 어린 이사벨이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개버스턴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은 심해졌으며 그의 중심에는 국왕의 사촌이었던 랭카스터 백작 토마스가 있었죠. 토마스의 어머니였던 아르투아의 블랑쉬는 이사벨의 외할머니로 토마스는 이사벨의 외삼촌이기도 했었습니다.이런 상황은 이사벨의 아버지였던 필리프 4세가 개버스턴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지지하게 만듭니다. 필리프 4세는 이사벨의 식솔들을 통해서 이들 귀족들을 지원했으며 결국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추방해야만 했었습니다. 개버스턴이 추방당한 뒤에야 이사벨은 왕비로써의 영지등을 부여받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필리프 4세는 지원을 중단했고 개버스턴은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 조지와 함께 있는 랭카스터 백작 토마스

성 조지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입니다



개버스턴이 돌아온뒤 이사벨은 그와 적대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개버스턴과 이사벨 그리고 에드워드는 잘 지냈는데 이런 상황에 대해서 개버스턴의 라이벌이었던 랭카스터의 토마스는 이사벨을 개버스턴 측 사람이라고 여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사벨은 아버지의 지원없이 개버스턴을 지지하는 남편과 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듯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둘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을 택했었던 듯합니다.

개버스턴과 평온하게 지낸 1309년에서 1311년 사이 이사벨은 궁정에서 자신의 편을 만들게 됩니다. 이사벨을 지지하게 된 가문의 중심은 버몬트 가문으로 이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과는 적대적이었었죠. 어쩌면 적의 적은 나의 친구였기에 이사벨이 자신을 지지하는 버몬트 가문의 적의 적이었던 개버스턴과 편안하게 지낼수 있었던듯합니다. 특히 이사벨은 버몬트 가문의 어른중 한명이었던 이사벨라 드 베시(이사벨라 드 버몬트)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버스톤

후대 상상화


하지만 1311년 정치적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1311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는 패배했고 이사벨과 에드워드는 간신히 잡히는것만을 면할수 있었죠. 이런 상황은 국왕과 개버스턴 그리고 이사벨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귀족들은 국왕에게 개버스턴과 이사벨라 드 베시 그리고 이사벨라의 남동생인 헨리 드 보몬트를 궁정에서 추방하라고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312년 내전이 다시 일어나게 되자, 이사벨은 남편측에 서게 됩니다. 이사벨은 숙부들에게 남편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남편이 전장으로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이사벨을 떠나 전장으로 갑니다. 하지만 귀족들과의 전투는 실패였고 에드워드는 간신히 빠져나왔고 개버스턴은 결국 항복하게 되죠. 그리고 개버스턴의 적들이었던 기 드 보챔프와 랭카스터의 토마스는 개버스턴을 처형합니다.



피어스 개버스턴을 처형한 기 드 보챔프



에드워드는 다시 이사벨 곁으로 돌아왔으며 실권은 랭카스터 백작이 장악하게 됩니다. 에드워드는 개버스턴의 죽음에 좌절을 느꼈으며 그의 복수를 할 날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와중에 이사벨은 에드워드의 후계자가 될 아들 에드워드를 낳게 됩니다. 사실 에드워드는 이미 사생아가 있었으며 아마도 결혼할 당시 이사벨이 어렸기에 수년간 정부들과 함께 지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어쨌든 후계자가 태어나면서 이사벨의 입지는 더 강화되었으며 에드워드 역시 랭카스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었죠.


이런 상황은 에드워드가 처가인 프랑스 측의 지지를 얻으려하게 만듭니다.실제로 이사벨의 숙부였던 루이 데브뢰가 파리에서 오기도 했었죠. 아마 이런 상황은 이사벨이 남편과 함께 프랑스를 방문하도록 만들었던듯합니다. 1313년 이사벨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아버지와 오빠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행복한 방문은 프랑스가 영국 귀족들에 대항에서 에드워드를 지원하기로 하는 약속을 받아낸뒤 끝나는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문은 곧 프랑스 왕가에 타격을 주는 스캔들을 밝혀내는 계기가 되죠. 이사벨은 이 방문때 오빠들과 올케언니들에게 동전주머니를 선물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으로 돌아와서 연회를 개최했을때 두명의 노르만 기사가 그 동전주머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이사벨은  그 기사들이 이것을 선물받은것으로 아마도 누군가에서 사랑의 증표로 받았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314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사벨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죠. 이 사건은 곧 필리프 4세의 두 며느리들인 부르고뉴의 블랑쉬와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그녀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알려진 두명의 기사들은 처형당하게 됩니다. 사실 필리프 4세는 아들들을 모두 정략결혼시켰는데 이때문에 아들들과 며느리들은 사이가 나빴었고 이런 상황은 결국 이런 결과를 낳았던듯합니다. 어쨌든 이 상황은 프랑스에 큰 충격을 줬으며 프랑스의 카페 왕가 본가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상황은 후에 이사벨에게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가는데,올케들의 부정을 고발했던 이사벨 역시 후에 연인이었던 로저 모티머와 함께 잉글랜드를 침공해서 남편을 몰아내고 연인과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샤를 4세와 부르고뉴의 블랑쉬의 결혼무효

필리프 4세는 아들들을 모두 부르고뉴 공작의 딸들과 결혼시켰는데 부르고뉴 출신의 세명의 며느리들중 둘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뒀습니다. 후에 샤를 4세는 아내와 결혼무효를 선언했습니다. 



개버스턴이 죽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측으로 기울면서 이사벨의 삶은 평온을 되찾을수 있을까 했습니다만, 불행히도 이사벨의 삶에 제일 문제가 되는 인물이 핵심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바로 드스펜서 부자라고 불렸던 윈체스터 백작 부자중 아버지쪽이었던 휴 르 드스펜서가 국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핵심인물로 부상한것이었죠. 그는 에드워드 1세시절부터 외교관으로 활약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국왕을 위해 웨일즈 귀족들이 국왕에 충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때문에 에드워드가 그를 총애하기 시작한것이었죠.

하지만 그의 부상보다는 그의 아들쪽이 이사벨에게는 더 큰 문제였을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