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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56)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 : 마담 드 몽테스팡과 루이 14세의 아들(두번째)

엘아라 2015. 7. 1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한개로 끝낼려고 했는데 결국 두개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두개로 넘어갈만한 내용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56)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 : 마담 드 몽테스팡과 루이 14세의 아들(두번째)



루이-오귀스트 드 부르봉

멘 공작

Louis-Auguste de Bourbon, 

duc du Maine

(31 March 1670 - 14 May 1736)



루이 14세의 적자는 딱 한명만 있었습니다. 바로 그랑 도팽이라고 알려진 아들 루이였죠. 그랑도팽에게는 세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부르고뉴공작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팽이 되었기에 "쁘띠 도팽"으로 알려진 루이, 앙주 공작이자 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5세가 된 필리프 그리고 베리 공작인 샤를이 있었죠.

그리고 쁘띠 도팽에게는 다시 세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

보통은 저기 아이가 루이 15세라고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옆에 있는 여성은 루이 14세의 아내인 마담 드 멩트농이 아니라 왕손들의 보모였던 마담 드 방타두르(방타두르 공작부인)이라고 합니다.



1715년까지 살았던 루이 14세는 자신의 적자와 그 후손들이 죽어 나가는것을 그대로 지켜봐야했습니다. 그랑 도팽이 1711년 사망했으며 쁘띠 도팽은 1712년 사망했고 쁘띠 도팽의 장남은 어려서 죽었고 차남 역시 1712년 사망했죠. 쁘띠도팽의 막내아들만이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는데 사실 이 막내아들도 죽을뻔한걸 유모의 헌신적 노력(의사들이 사혈하겠다고 몰려왔을때 문을 걸어잠그고 아이를 안 내놓고 스스로 돌봤다고 합니다.)때문에 살아날수 있었죠. 그리고 베리 공작 샤를은 1714년 후손없이 사망합니다. 펠리페 5세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그는 1700년 에스파냐 국왕이 되면서 더이상 프랑스 왕위계승을 할수가 없었죠.

이런 상황은 루이 14세의 유일한 증손자인 루이가 느닷없이 죽거나 후손없이 사망할경우 프랑스 왕위가 루이 14세의 후손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아들과 그 후손에게 물려질수가 있었죠.

물론 조카이자 170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를레앙 공작이 된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와 마담 드 몽테스팡의 딸과 결혼했었지만 말입니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이런 상황은 멘 공작이 야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1714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서자들(멘 공작과 그의 동생인 툴루즈 백작)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는 작업을 합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서자들을 적자들 다음의 지위로 부여할수는 없었기에 "Prince du Sang"의 지위를 부여해서 부르봉 가문의 왕위계승권의 맨끝에 올려둡니다. 부르봉 가문의 경우 앙리 4세의 직계가 우선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그 직계가 단절될 경우 부르봉 가문의 분가인 콩데와 콩티 가문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면 이후에는 오를레앙 공작 가문으로 프랑스 왕위가 가고 오를레앙 공작가문이 단절되면 콩데 가문 그리고 콩티가문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계승에 루이 14세는 콩티 가문마저 단절될경우 자신의 서자들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을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것이었죠. 

아마도 이것은 프랑스에 남은 직계왕위계승자가 어린 증손자 하나밖에 없었던 루이 14세가 취할수 있는 당연한 선택이었을것입니다만 조카이자 사위였던 오를레앙 공작의 반발등을 피할수는 없었습니다. 



멘 공작


1715년 8월 루이 14세는 죽음이 임박해오는것을 알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실시될 군 퍼레이드에 자신의 대리로 멘 공작을 참석시킵니다. 이것은 많은 이들에게 여러가지를 시사하는 것이었는데 오를레앙 공작에게는 당연히 위기로 생각했었죠.



1715년 9월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다섯살의 루이 15세가 즉위하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유언으로 멘공작과 오를레앙 공작 둘을 섭정으로 임명했었죠.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국왕이 죽은 다음날 의회에서 유언을 무효화 시키고 자신이 단독으로 섭정이 되죠.

멘공작의 아내였던 루이즈 베네딕테는 남편이 섭정이 되지 못한것에 매우 실망했으며 남편에게 "첼라마레 음모"라고 불리게 되는 음모에 가담하라고 부추김을 받게 되죠.



루이 15세


첼레마레 음모는 1718년 당시 프랑스 궁정에 머물던 에스파냐 대사였던 "첼라마레 공" 안토니오 델 주데체의 이름을 딴것으로 루이 15세의 섭정 지위를 오를레앙 공작이 아니라 루이 15세의 숙부이자 에스파냐 국왕이었던 펠리페 5세가 맡게 하려했었던 음모라고 합니다.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멘공작은 체포되었고 멘 공작부인은 디종으로 몸을 피해야했었다고 합니다. 

1720년 부부는 용서를 받고 다시 궁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멘 공작부인은 자신이 남편에게 강요를 해서 그가 하는수없이 이 음모에 참여하게되었다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부부는 루이 14세가 멘 공작을 위해 사준 "소 성"에서 예전보다는 훨씬 평온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루이즈 베네딕테는 자녀들 결혼을 위해 여러번 노력했지만 혼담을 자주 거절당해서 속상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멘 공작부인


멘 공작은 1736년 소에서 66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멘 공작부부는 일곱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그중 세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셋모두가 미혼으로 사망했으며 결국 멘공작의 영지와 재산은 멘 공작의 동생인 툴루즈 백작의 아들인 팡티에브르 공작에게 물려지게 되죠.(..그리고 이 많은 재산때문에 다시 오를레앙 공작가문이랑 엮기고 말입니다.-0-;;;)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