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에드워드 1세와 레오노르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심지어 남편이 십자군 전쟁때 화살을 맞아 죽을뻔했는데 그 상처를 레오노르가 입으로 빨아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가 엄청많네요. -0-;;;;
잉글랜드의 왕비들...(31)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첫번째)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잉글랜드의 왕비
Eleanor of Castile
(1241 – 28 November 1290)
에드워드 1세의 첫번째 아내이자 남편과 매우 행복했다고 알려져있는 카스티야의 레오노르는 1241년경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의 국왕 페르난도 3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퐁티외 여백작 잔느(에스파냐 식으로는 후아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인 베렝가리아를 통해서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받았고 아버지인 레온의 알폰소 9세를 통해서 레온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카스티야 국왕들은 레온의 국왕지위도 물려받게 되죠. 페르난도 3세의 외할머니였던 엘레노어는 바로 잉글랜드의 헨리2세와 그의 부인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딸이었으며, 이때문에 프랑스의 블랑쉬 왕비는 페르난도 3세의 이모이기도 했었죠. 또 페르난도 3세의 다른 이모인 우라카는 포르투갈의 왕비였고, 또다른 이모인 레오노르는 아라곤의 왕비였죠.
카스티야의 국왕 페르난도 3세
레오노르의 아버지
레오노르의 어머니인 잔느는 퐁티외 백작의 장녀로 퐁티외 백작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습니다.퐁티외 백작가문은 좀 복잡한데 잔느의 아버지였던 시몽은 다마르탱 백작의 아들이었으며 잔느의 어머니인 마리가 퐁티외 백작의 상속녀였습니다. 잔느의 외할머니는 프랑스의 공주였던 알리스 드 프랑스로 바로 루이 7세의 딸이자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1세의 약혼녀였으며 헨리 2세와 연애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던 그 공주였죠. 리처드가 약혼을 파기한뒤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퐁티외 백작인 기욤 4세와 결혼합니다. 사실 알리스의 남동생이었던 필리프 2세는 누나와 퐁티외 백작사이에 후계자를 못얻을것이라고 여겼고 이후에 퐁티외 백작령을 얻으려고 둘을 결혼시켰다고 합니다만, 알리스는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딸인 마리는 퐁티외 백작의 상속녀가 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가측은 다마르탱 백작의 아들과 마리를 결혼시켜서 퐁티외 백작령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했다고 합니다.
이런 정치적 문제는 후에까지 이어지는데 잔느의 경우 존왕은 자신의 장남인 헨리와 퐁티외 백작의 상속녀인 잔느를 결혼시키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프랑스 왕가의 반대에 놓이게 되었죠. 결국 잔느는 블랑쉬 왕비의 조카였던 페르난도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스티야 왕비로써의 잔느 드 다마르탱의 문장
레오노르는 당대 많은 여성들처럼 정확한 출생년도를 알수 없는데 훗날 그녀가 죽은 해에 그녀의 삶에 대한 기록으로 그녀의 나이를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고 합니다. 레오노르의 남자형제들중 페르난도가 1239년이나 1240년경에 태어났고 루이스가 1242년이나 1243년경에 태어났기에 아마도 레오노르는 1241년경에 태어났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레오노르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3세는 그녀가 11살 무렵 사망했으며 이후에는 이복오빠인 알폰소 10세의 궁정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3세나 오빠인 알폰소 10세 모두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며 궁정의 이런 환경은 레오노르 역시 중세 다른 여성들보다 교육을 많이 받게 했을것입니다.
레오노르가 자라면서 역시 다른 중세 여성들처럼 정략결혼의 대상이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이베리아 반도내 국가들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레오노르의 이복오빠인 알폰소 10세는 즉위한뒤 나바라와의 우호를 위해 동생을 나바라의 국왕이었던 테오발도 2세와 결혼시키길원햇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나바라의 섭정이었던 모후 마르거리트는 아라곤과의 협력을 택했고 결국 둘사이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폰소 10세는 동생을 또다른 정치적 문제에 이용하게 됩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레오노르의 오빠
알폰소 10세는 즉위후 가스코뉴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곳은 잉글랜드가 장악한 마지막 프랑스 영지중 하나였는데 그는 증조할머니중 한명이었던 잉글랜드의 엘레노어가 카스티야로 시집오면서 이곳을 지참금으로 가져왔으며 결국 엘레노어의 후손인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것이었죠. 이 상황은 잉글랜드와 카스티야 사이의 무력충돌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평화적 협상을 위한 노력도 했었습니다.
결국 1254년 알폰소 10세와 헨리 3세는 만났으며 둘은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알폰소 10세의 여동생인 레오노르를 결혼시켜서 레오노르를 통해 가스코뉴 공작 지위에 대한 권리를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에게 물려주는것으로 합의 봅니다. 아마도 이 상황은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 공작 지위를 주고 싶어했었던 헨리 3세의 왕비인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영향이 컸을듯합니다.
이 협상 결과 13살의 레오노르는 1254년 11월 1일 카스티야의 부르고스에서 15살의 잉글랜드 국왕의 장남인 에드워드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둘이 결혼하려면 사면장이 필요한거 아닌가 싶었는데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랑 그쪽 집안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냐..라는 생각이 잠깐 듭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레오노르의 남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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