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자벨과 존의 갑작스러운 결혼은 훗날의 이자벨의 행동과 연결되어서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게 됩니다. 존의 갑작스러운 돌출 행동은 이자벨이 마법을 써서 국왕을 홀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이자벨과 존의 결혼은 결국 정치적 목적이 강햇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정치적 목적이 완전히 실패하는 바람에 그냥 묻혀버리게 되지만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22) 앙굴렘의 이자벨 : 존 왕의 왕비 (두번째)
이자벨 당굴렘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왕비
라 마르셰 백작부인
앙굴렘 여백작
Isabella of Angoulême
Isabelle d'Angoulême,
(c.1188 – 4 June 1246)
이자벨의 씰
겨우 "중세 시대의 결혼 적령기"였던 12살에 접어든 이자벨이었지만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금발머리에 푸른눈에 매우 아름다웠더 그녀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중세시대의 헬렌"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34살의 존왕은 자신보다 22살이나 어린 이자벨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고 정치적 동맹따위는 잊어버리고 그녀와 결혼하길 원하게 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대 사람들에게도 좀 의외였는지 연대기 기록에는 이자벨이 존에게 마법을 부린것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존이 과연 단순히 이자벨의 아름다움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할수만은 없을듯합니다. 왜냐면 뤼지냥 가문은 존의 봉신이긴했지만 뤼지냥 가문이 강력한 앙굴렘 백작령을 얻게 되는 것은 존에게도 역시 위협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존이 이자벨과 결혼한다면 그녀를 통해 앙굴렘 백작령을 통치할수 있을것이고 이런 상황은 어쩌면 프랑스 내에서 잠재적 위협을 어느정도 줄일수 있게 될수 있을것이라 여겼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물론 존이 이자벨과의 결혼을 선택한것은 결국 뤼지냥 가문이 존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의 숙적인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되지만 말입니다.
사냥 중인 존 왕
이자벨의 아버지인 앙굴렘 백작은 딸을 숙적에게 시집보내는것보다는 차라리 상위군주인 잉글랜드 국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을것입니다. 이에 그는 딸과 존왕의 결혼을 지지하는 입장이 됩니다. 존은 뤼지냥 가문의 결혼 반대를 우려해서 라 마르셰 백작을 멀리 보내버린뒤 존은 이자벨과 결혼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자벨의 아버지인 앙굴렘 백작은 핑계를 대서 딸을 뤼지냥 가문에서 빼내왔으며 딸이 오자마자 존왕과 결혼식을 치루게 합니다. 이자벨은 느닷없는 상황에 항의했을듯합니다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죠. 중세시대의 여성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해야했으니까요. 1200년 8월 24일 이자벨과 존 왕은 결혼식을 치루게 됩니다. 이 날은 원래 이자벨이 위그 드 뤼지냥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던 날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국왕인 필리프는 이 결혼을 찬성했는데 그는 아마도 이 결혼으로 뤼지냥 가문이 존에게서 등을 돌릴것을 예상했을것입니다.
위그 드 뤼지냥의 씰과 문장
이거 위그 10세 씰입니다.-0-;;
이자벨은 이제 잉글랜드의 왕비로 궁정에 살았지만 아무래도 어린 나이의 이자벨은 궁정에서 그다지 큰 권력은 없었던듯합니다. 국왕의 어리고 아름다운 왕비였을뿐이었죠. 이자벨은 왕비로써 누려야할 부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남편을 통해서 일정한 부분만 돈을 받게 됩니다. 이때문에 이자벨은 결국 남편이자 국왕인 존에게 의지해야했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가 궁정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게 만들었죠. 아마도 존은 아내인 이자벨이 앙굴렘 백작령을 스스로 통치하는것을 막으려 했고 그를 위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던듯합니다.
이런 상황은 이자벨이 존의 열정에 보답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어렸었지만 이자벨 역시 시어머니처럼 자신의 권리를 알았을것이며 이런 권리를 행사하는것을 막고 있는 남편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일수는 없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존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정부들을 뒀었으며 이런 상황 역시 이자벨이 늙은 남편을 사랑할수 없는 일중 하나였을수도 있을듯합니다.
존 왕
후대의 그림
이런 상황은 존 왕의 실정과 맞물리면서 아마도 이자벨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사람들은 국왕외에도 실정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을것이며 국왕의 제일 가까이 있는 왕비가 그 표적이었을것입니다. 이때문에 이자벨은 성경에서 아합왕을 실정하게 만들었던 그의 아내 "이세벨"왕비에 빗대어지는 소문이 퍼졌을것같습니다.
어쨌든 이자벨은 잉글랜드의 왕비로써 자신의 의무는 완수하게 됩니다. 그녀는 첫아들인 헨리를 19살때인 1207년에 낳습니다. 그리고 이후 존이 죽기 1년전인 1215년까지 존에게 다섯아이를 낳아주게 되죠.
존왕과 그의 자녀들
1216년 존왕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실의에 빠진채 사망합니다. 그리고 존과 이자벨의 아들인 헨리가 국왕으로 즉위하죠. 이자벨의 지위는 모호했는데 미성년 국왕의 모후이긴 햇지만 존은 미성년 아들을 위한 열세명의 섭정 명단에 아내의 이름을 넣지 않았었죠. 게다가 외국인이었기에 잉글랜드 궁정에서 헨리 섭정들은 이자벨에게 정치적 의무를 고려하지 않았었고 이자벨은 궁정에서 소외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자벨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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