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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왕비들...(23) 앙굴렘의 이자벨 : 존 왕의 왕비 (세번째)
이자벨 당굴렘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왕비
라 마르셰 백작부인
앙굴렘 여백작
Isabella of Angoulême
Isabelle d'Angoulême,
(c.1188 – 4 June 1246)
퐁테브로 수도원 내에 있는 이자벨의 묘의 조상
이미 남편 생전에도 정치에서 소외당하던 이자벨은 남편이 죽고 미성년인 아들 헨리 3세가 즉위한 뒤에도 잉글랜드 정치에서 소외당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그녀가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회를 잡게 되죠.
1217년 이자벨은 장녀인 조앤을 데리고 앙굴렘으로 갑니다. 조앤은 정치적 목적으로 뤼지냥 가문의 사람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바로 이자벨의 전 약혼자였던 라 마르셰 백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위그 드 뤼지냥이었죠. 이때 조앤의 나이는 겨우 7살이었고 이렇게 어린 아이의 결혼은 교회에서 잘 인정을 해주지 않았기에 아마도 조앤은 나이가 찰때까지 이자벨이 그랬던것처럼 뤼지냥 가문에서 살기로 되어있었을듯합니다. 이런 조앤을 데려다주러 이자벨이 따라 간것이었죠. 어쩌면 이자벨은 소외당하는 잉글랜드의 궁정보다는 자신의 영지인 앙굴렘에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조앤
스코틀랜드의 왕비
하지만 1220년 이자벨은 자신의 전 약혼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딸의 약혼자이며 이제 라 마르셰 백작이었던 위그 10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자벨과 라 마르셰 백작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또다른 문제가 됩니다. 존왕의 반기를 들었던 뤼지냥 가문이 다시 잉글랜드를 지지하는 것일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자벨은 아들에게 결혼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에서 위그 10세가 후계자를 얻어야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조앤의 어린 나이가 문제가 되었기에 다른 신부후보를 찾았으며 결국 프랑스쪽의 신부감을 얻는것보다는 자신이 위그 10세와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자벨과 위그 10세 사이에는 모두 아홉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잉글랜드 쪽에서는 국왕의 허락없이 한 결혼에 대해서 과부산등의 연금을 줄수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이에 이자벨은 딸인 조앤을 잉글랜드로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잉글랜드측에 자신에게 지급될 돈을 주길 요구합니다. 이자벨이 결혼한뒤, 잉글랜드 측에서는 조앤을 스코틀랜드와의 조약을 위해 스코틀랜드 국왕의 신부로 결정했는데, 이자벨은 자신에게 돈을 돌려줄때까지 조앤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결국 잉글랜드는 이자벨에게 과부산을 되돌려줬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이자벨의 과부산을 돌려받을때까지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적 행동을 취했고 이런 상황은 이자벨의 아들인 헨리 3세의 섭정단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1230년 이자벨의 아들인 헨리 3세는 프랑스의 땅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를 침공합니다. 이때 이자벨은 아들을 만났다고 합니다만,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헨리3세 측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헨리 3세의 다른 침공 시도때도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헨리측을 지지하기로 약속했지만 정작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바라의 국왕과 브르타뉴 공작과 함께 있는 위그 10세 드 뤼지냥
이자벨은 비록 프랑스에서는 겨우 백작부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잉글랜드에서보다 훨씬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나 잉글랜드에 중요한 동맹이었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가 권력을 가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위그 10세 역시 다른 중세 남성들처럼 정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자벨은 이런 남편에 대해서 매우 화를 내고 자주 싸우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그녀에 대해 동시대 인물들이 이자벨이 "간악하고, 음모를 좋아하며 문제를 일으키는"인물이라고 묘사하게 만들었던듯합니다.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1240년대 프랑스 왕가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루이 8세가 아들인 알퐁스에게 유언으로 푸아투를 상속했는데 위그 10세의 세력이었던 푸아투에 대해서 프랑스 왕권이 직접 관여하려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반란에 이자벨의 아들인 헨리 3세까지도 호응합니다만 반란은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루이 9세와 그의 섭정모후인 카스티야의 블랑쉬는 이자벨과 위그 10세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하지만 1244년 프랑스 왕실 요리사 두명이 체포되었고 둘은 이자벨의 사주로 국왕과 그의 동생을 독살하려 했다고 자백합니다. 이자벨은 체포되기전 퐁테브로의 성역권으로 도망쳤으며 결국 이자벨은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푸아투 백작 알퐁스
알퐁스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블랑쉬는 헨리2세와 엘레오노르 다퀴텐의 외손녀이기도 했습니다.
이자벨은 처음에는 성당 밖에 묻혔는데 헨리 3세는 어머니가 야외에 묻힌것에 무척이나 경악했으며 시신을 성당안으로 옮기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이자벨은 후에 시어머니 곁에 묻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자벨의 두번째 남편인 위그 10세는 1248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서 성지로 떠났는데 1249년 다미에트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자벨과 위그 10세의 자녀들중 상당수는 잉글랜드로 가서 헨리 3세의 보호아래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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