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25) 앙굴렘의 이자벨 : 존 왕의 왕비 (다섯번째)

엘아라 2015. 4.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이자벨 당굴렘 마지막입니다.

다음으로는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해야할차례군요.-0-;;;


그나저나 중세는 진짜 힘들어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25) 앙굴렘의 이자벨 : 존 왕의 왕비 (다섯번째)



이자벨 당굴렘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왕비

라 마르셰 백작부인

앙굴렘 여백작

Isabella of Angoulême

Isabelle d'Angoulême

(c.1188 – 4 June 1246)


이자벨 당굴렘은 1220년 옛 약혼자이자 장녀의 약혼자였던 라 마르셰 백작 위그 10세와 결혼합니다. 위그 10세의 아버지인 위그 9세는 1219년 사망하는데 아마 이후 이자벨 당굴렘이 그와 결혼하는걸로 봐서 어쩌면 위그 9세는 이자벨과 아들의 결혼을 반대했을듯합니다. 재미난것은 이자벨의 사촌이자 시어머니가 되는 마르거리트 당굴렘은 잉글랜드와의 투쟁에서 프랑스측을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1233년 사망하는데 그전까지 라 마르셰 백작은 프랑스측에 좀더 호의적이었으며 어쩌면 이것은 어머니인 마르거리트당굴렘의 영향이 아니었을까합니다. ㅎㅎㅎㅎ



위그 10세의 씰


이자벨과 위그 10세 사이에서는 모두 아홉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첫째는 아들이자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라마르셰 백작이자 앙굴렘 백작이 되는 위그 11세입니다. 그는 아마 프랑스 측의 중요한 세력중 하나였기에 어려서부터 여러번의 혼담이 오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툴루즈 백작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여동생인 이자벨과의 혼담이 오갔었다고합니다. 결국 브르타뉴 공작의 딸인 욜랑드와 결혼했으며 둘사이에서는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위그 11세는 왕제이자 푸아투 백작이었던 알퐁스를 따라 7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으며 파리스크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위그 11세의 문장

영어 위키에는 위그 10세 문장이라고 나오는데프랑스어 위키에는 위그 11세 문장이라고 표시된다죠.-0-;;;

아마도 라 마르셰 백작으로써 뤼지냥 가문의 문장인듯합니다.



둘째는 아들인 아이메르 드 뤼지냥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죽은뒤인 1247년 이복 형인 헨리 3세의 궁정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는 윈체스터의 주교가 되는데 영어를 잘 못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던 그에 대해서 잉글랜드 사람들을 적대감을 표출했다고합니다. 후에 내전 상황이 되면서 아이메르는 국외로 추방당하게되죠. 이후 그는 다시 교황의 지지로 윈체스터 주교 지위를 유지합니다만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도중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딸인 아그네스로 그녀는 샤토루의 남작인 기욤 2세 드 쇼비니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둘사이에는 자녀가 있습니다.


넷째는 딸인 알리스로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뒤인 1247년 교황대사와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오게 됩니다. 그녀는 국왕의 친척으로 잉글랜드에서 사는데 이복오빠인 헨리는 알리스를 6대 서리 백작인 존 드 워렌과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헨리 3세가 자신의 뤼지냥 가문 이부 동생들을 잉글랜드에 정착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존 드 워렌과 알리스 사이에서는 모두 세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워렌 가문의 문장


다섯째는 아들인 기 드 뤼지냥입니다. 아마 그 역시 어머니가 죽은뒤 잉글랜드로 건너왔었던듯합니다. 그는 내전중 헨리 3세 측의 결정적 패배중 하나였던 "루이스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만 몇몇 이야기에서는 그가 프랑스로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여섯째는 아들인 조프리 드 뤼지냥으로 1259년 샤텔로 여자작인 잔느와 결혼했고 샤토네프와 자르낙의 영주였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딸인 이자벨입니다. 그녀의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는데, 1227년 문서에 그녀에 대해서 언급이 있기에 아마 그 이전에 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투 백작 알퐁스와 약혼합니다. 아마도 푸아투에 대한 뤼지냥 가문의 반란이 끝난후 평화조약을 통해서 약혼한듯합니다만 이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의 귀족가문이었던 크라공 가문의 영주인 모리스 4세와 결혼했고 이 결혼으로 적어도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1년뒤에 프랑스 귀족이었던 조프리 드 랑콩과 재혼했다고 합니다. 조프리 드 랑콩의 선조중 한명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군대를 이끌던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이 결혼으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자벨은 이부오빠인 헨리로부터 연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크라공 가문의 문장


여덟째는 아들인  기욤 드 뤼지냥으로 후에 영국에서는 윌리엄 드 발렌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인물입니다. 기욤은 어머니가 죽은 뒤 형들인 아이메르와 기와 함께 이부형인 헨리 3세의 초대를 받아들여 잉글랜드로 가게 됩니다. 기욤은 펌브로크 백작의 상속녀였던 조앤(조애너)와 결혼해서 펌브로크 백작이 되죠. 

그와 그의 형제들은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으며 결국 떠나라는 강요를 받게 됩니다. 기욤은 아내와 일가 친척들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내전때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됩니다. 루이스 전투 이후 다시 프랑스로 갔었던 윌리엄은 다시 잉글랜드로 와서 싸웠으며 다시 펌브로크 백작 지위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윌리엄과 조앤 사이에서는 모두 일곱명 이상의 아이들이 태어나는데 둘의 아들이자 2대 펌브로크 백작인 아이머 드 발렌스는 사촌인 에드워드 1세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기욤 드 뤼지냥의 문장

펌브로크 백작으로써의 문장


아홉째는 딸인 마르거리트입니다. 마르거리트는 처음에는 툴루즈 백작인 레몽 7세와 결혼합니다. 레몽 7세는 헨리 2세의 외손자로 그의 어머니는 시칠리의 왕비였던 조앤이었죠. 그는 아라곤의 산차와 첫 결혼을 했으며 아내를 잃은후 프로방스의 산차와 결혼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로방스의 산차는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웰 백작 리처드와 결혼했으며 결국 대신 마르거리트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1249년 레몽 7세가 사망한뒤 마르거리트는 투아르 자작과 재혼했다고 합니다.



툴루즈 백작 레몽7세의 씰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