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19) 나바라의 베렝가리아 : 리처드 1세의 왕비(첫번째)

엘아라 2015. 3.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리처드 1세가 유명하긴한데 의외로 베렝가리아에 대해서는 많이 모르는듯해요

하긴 중세 여성들이 대부분 그렇죠 뭐--;;;


잉글랜드의 왕비들...(19) 나바라의 베렝가리아 : 리처드 1세의 왕비(첫번째)



나바라의 베렝가리아

잉글랜드의 왕비

Berengaria of Navarre 

Berenguela,Bérengère

(c. 1165–1170 – 23 December 1230) 

19세기 상상화 -0-;;


"사자심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왕비였던 베렝가리아는 나바라의 국왕인 산초 6세와 그의 부인인 카스티야의 산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산초 6세는 나바라에서 처음으로 "국왕(King)"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로 산초 6세의 아버지였던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아라곤왕국과 연합해있었던 나바라 왕국을 독립시켜서 나바라의 통치자가 된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베렝가리아의 어머니였던 카스티야의 산차는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7세와 그의 부인인 바르셀로나의 베렝가리아의 딸로 태어났었죠. 아마도 베렝가리아라는 이름은 외할머니인 바르셀로나의 베렝가리아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일듯합니다.



베렝가리아의 아버지

나바라의 산초 6세

역시나 상상화-0-;;;


베렝가리아의 어린시절은 다른 중세 여성들처럼 많이 알려져있지 않았습니다만 1185년 20살때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중세시대를 정확히는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일단 결혼적령기가 낮았던 중세시대에 20살때까지 미혼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베렝가리아도 수녀가 되길 바랬거나 부모가 수녀가 되길 바랬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


1190년 25살무렵의 베렝가리아에게 혼담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리처드 1세와의 혼담이었죠. 당시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왕이었으며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리처드의 후계자 문제를 걱정했었던 리처드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가 아들의 신부감으로 선택한 인물이 바로 베렝가리아였습니다.




엘레오노르 다키텐

역시나 상상화버전


사실 리처드는 이전에 프랑스의 공주였던 알리스와 약혼중이었습니다. 알리스는 전통대로 어린시절 잉글랜드로 와서 잉글랜드 궁정에서 자라면서 나이가 차면 리처드와 결혼할 예정이었죠. 하지만 잉글랜드 궁정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헨리2세와 엘레오노르는 불화했고 엘레오노르가 가장 사랑한 아들인 리처드도 이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헨리2세는 지참금으로 프랑스쪽 영지를 가져온 알리스와 리처드의 결혼을 승인해주지 않았고 이런 상황은 곧 소문들을 돌게 합니다. 헨리 2세 불화한 아내와 이혼하고 며느리인 알리스와 결혼하려 한다거나, 또는 이미 알리스가 그의 정부이기에 아들과 알리스와의 결혼을 승인해주지 않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었죠. 결국 이런 상황은 리처드가 국왕이 된뒤 알리스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알리스와 아들의 결혼을 원치 않았던 엘레오노르는 아들을 위해 신부감을 찾아나섰으며 선택한 여성이 바로 베렝가리아였습니다.




리처드1세

하는김에 상상화 버전으로 통일-0-;;


엘레오노르가 베렝가리아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들을 이해할수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왕이긴했지만 형인 헨리가 오래도록 살아있었으며 리처드는 어머니쪽 영지를 이어받게 되어있었기에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라 "남프랑스의 공작"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리처드가 남프랑스쪽에 문화에 더 익숙했었죠. 이에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의 인근 지역이기도한 나바라의 공주였던 베렝가리아가 리처드와 더 잘맞을것이라고 여겼었다고 합니다.


1190년 엘레오노르는 나바라의 국왕인 산초 6세의 궁정이 있는 팜플로나로 가서 리처드와 베렝가리아의 결혼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국왕의 모후와 나바라의 국왕은 둘의 자녀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죠. 하지만 이 약혼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는데 그때까지도 리처드와 프랑스의 알리스의 약혼이 정리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리스와의 약혼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알리스의 남동생인 프랑스의 필리프 국왕이 누나가 불명예스럽게 파혼당하는것을 원치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필리프와 리처드



어쨌든 베렝가리아는 시어머니가 되는 엘레오노르와 함께 리처드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리처드는 이미 십자군 원정에 참가중이었으며 결혼을 위해 원정에서 돌아올 마음이 없었죠. 이때문에 엘레오노르는 며느리감인 베렝가리아를 데리고 아들에게로 가게 됩니다. 베렝가리아와 엘레오노르는 먼저 시칠리로 갑니다. 그곳에는 엘레오노르의 딸인 조앤이 있었죠. 조앤은 시칠리 왕비였지만 이때쯤 그녀는 과부가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조앤은 어머니와 올케언니가 될 베렝가리아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되죠.조앤과 베렝가리아는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지로 가던중 조앤과 베렝가리아가 탄 배가 키프러스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때 키프러스의 군주였던 이삭 콤넨노스가 두여성을 사로잡아버립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된 리처드는 키프러스를 점령했으며 여동생과 약혼녀를 구하게 되죠. 리처드에게 구출된 베렝가리아는 사이프러스에서 1191년 5월 12일 결혼했고 이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죠.



1190년경의 성지와 그 부근 상황

보라색이 키프러스 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