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를 번외편으로 넣을까 정식으로 넣을까 고민하다가 대관식했다는 글을 보고 그냥 넣을까합니다. 늘 그렇지만 중세시대 여자들은 진짜 별 내용이 없어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18)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 젊은왕 헨리의 왕비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잉글랜드의 왕비
헝가리의 왕비
Margaret of France
(1157 – August/September 1197)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는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그리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기록이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후계자를 바라고 있던 루이 7세가 또 딸이 태어난것에 매우 실망스러워해서였을듯합니다.
루이 7세는 이미 후계자에 대한 걱정으로 강력한 영주이자 봉신이었던 엘레오노르 다퀴텐과 이혼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번째 부인의 첫아이가 딸인것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었을듯합니다.
루이 7세와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중세시대 왕족 여성들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을 했으며 마르그리트 역시 똑같은 운명이었습니다. 태어난지 1년되지 않아서 마르그리트는 혼처가 정해지게 됩니다. 바로 아버지의 전처였던 엘레오노르 다퀴텐의 아들인 헨리였죠. 1158년 둘의 약혼은 결정되었죠.
1160년 10월 마르그리트의 어머니 콩스탕스가 사망했으며 그해 11월 마르그리트는 약혼자인 헨리와 결혼하게 됩니다. 중세시대 약혼은 결혼과 마찬가지였으며 미성년의 여성들은 약혼자의 궁정에서 결혼할 나이가 될때까지 자라는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에서도 14살 정도가 되었을때 여성들이 결혼을 하거나 수도원에 서원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봤으며 그 이전에는 옳지 않다고 봤었습니다. 12살정도는 용납되지만 이렇게 어린 아기들이 결혼하는 것은 사실 결혼무효가 될 중요한 요인중 하나였습니다. 교황의 면책을 받은 둘의 결혼은 성사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마르그리트가 가져올 지참금이 그녀의 시아버지였던 헨리 2세에게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헨리
마르그리트와 그녀의 남편은 모두 미성년었으며 결국 둘의 교육은 모두 헨리2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퀴텐이 맡았었습니다. 물론 마르그리트의 아버지였던 루이 7세는 이를 반대했지만 이미 딸은 자신의 곁을 떠난뒤여서 뭐라 할수 없었을것입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오래도록 별 기록이 없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엘레오노르 다퀴텐의 궁정에서 조용히 살았기때문일듯합니다.
1170년 그녀의 남편인 헨리는 아버지 헨리2세에 의해서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 마르그리트는 남편과 함께 대관식을 하지 못했었죠. 이상황에 대해서 그녀의 아버지였던 루이 7세는 우려를 했으며 결국 루이 7세의 중재로 마르그리트는 남편인 헨리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정식으로 대관하게 됩니다. 헨리 2세와 공동국왕이었고 이름도 아버지와 같은 헨리였기에 마르그리트의 남편은 "젊은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죠. 아마도 이전에 유아시절의 결혼식이었기에 1172년에 대관식이 마르그리트와 젊은 왕의 정식으로 인정받는 결혼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듯합니다.
젊은왕의 대관식
복잡한 정치 투쟁시기에도 마르그리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헨리 2세는며느리를 인질로 잉글랜드로 데려갔었던듯합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1177년 헨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겨우 3일만에 그녀의 아들은 사망하고 말게 되죠. 이후 마르그리트는 아이를 더 낳을수 없게 됩니다. 1182년 마르그리트는 남편의 가장 신임받던 신하였던 윌리엄 마셜(펌브로크 백작)과 스캔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헨리는 마르그리트와 이혼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었으며, 윌리엄 마셜은 국왕에게 직접 하소연하기도 했었고 마상결투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했었으며 결국 쾰른으로 순레여행을 떠나버리기까지 했었습니다.
이사건뒤로 마르그리트의 이야기는 한동안 찾아볼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그녀는 이후 프랑스에 있었으며 적어도 남편인 젊은왕이 사망할 무렵에는 프랑스에 친정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그녀의 이복동생인 필리프2세는 과부가 된 누나의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보통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왔을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보통은 인질로 잡고 돈 안주던가 그렇더라구요.)
필리프 2세
마르그리트의 남동생
...아버지 루이 7세는 보면 답답한데 아들인 필리프 2세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라는 분위기더라구요.
마르그리트는 1184년 남편을 잃었습니다만 과부로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왕과의 동맹을 맺고 싶어했던 헝가리의 벨라 3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벨라 3세는 결혼으로 강력한 동맹을 얻기 위해 여러 가문들과 접촉했었고 결국 1186년 프랑스 국왕의 누나였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었죠.
중세시대 당시에 헝가리는 서유럽국가들에게 매우 낯선곳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 역시 자신의 새로운 나라와 남편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죠. 하지만 헝가리의 국왕인 벨라 3세는 외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에 그리스어를 알고 있을정도로 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상당히 부유한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마르그리트는 이곳에서 편안한 삶을 살았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3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맞이해서 성대하게 대접했다고도 합니다. 또 헝가리에서 성 토마스 베켓을 공경하는 관습이 널리 퍼진것도 마르그리트때문이라고도 합니다.(토마스 베켓은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기전 젊은 왕과 마르그리트의 혼담을 성사시킨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십자군들이 있는 마르그리트와 벨라 3세
1196년 두번째 남편이 사망한뒤 마르그리트는 성지순례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아크레에 당도했으며 결국 아크레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티레 대성당에 묻히게 됩니다.
자료출처
1.위키피디어
2.http://henrytheyoungking.blogspot.kr/2013/02/marguerite-of-france-young-queen-c1158.html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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