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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카스티야와 레온의 이사벨 1세(다섯번째)

엘아라 2015. 4.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엉엉엉...영어 자막이 필요해요..ㅠ.ㅠ


[Isabel]카스티야와 레온의 이사벨 1세(다섯번째)




스티야의 이사벨 1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에스파냐의 공동군주

Isabella I 

(IsabelYsabel)

(22 April 1451 – 26 November 1504),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어느정도 내정이 안정이 되자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바로 "레콩기스타"라고 불리우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작업을 마무리하려한것이었죠.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오래도록 복잡한 이베리아 반도내 왕위계승문제는 결국 이슬람세력의 침입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이베리아 반도, 특히 아프리카와 가까운 남부지역은 15세기까지도 이슬람세력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런게 되자 이베리아 반도내 기독교 국가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결국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투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 투쟁을 "레콩기스타(Reconquista-대충 재정복 정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지역적 정치적 문제때문에 이 레콩기스타는 오래도록 진행되었는데 15세기가 끝나가는 무렵에는 그라나다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만이 이슬람 세력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구에루엘라 전투에서의 이슬람 세력

이 전투는 이사벨의 아버지인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2세가 그라나다의 이슬람세력과 전투를 한것이었다고 합니다만 기록이 많이 안 남아있고 뭐 카스티야가 이겼다고는 하는데 그라나다쪽을 점령한것도 아니고 그랬댑니다.


1482년 2월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메디나 델 캄포로 가서 그라나다와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때 그라나다의 이슬람 지배자들은 내분으로 인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리 쉽사리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차근차근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이베리아 반도쪽을 점령해나갔다고 합니다. 그라나다 인근을 차례로 점령해나갔던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1491년 봄 드디어 그라나다 포위공격을 시작했고 결국 1491년 말경그라나다를 통치하던 술탄 무하메드 12세는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한지 10년이 되던 1492년 2월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라나다에 입성하므로써 레콩기스타를 완수하게 되죠. 1년후 체결된 조약에서는 그라나다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만, 훗날 이 조약은 깨지게 됩니다.

이사벨은 이때 특히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를 높이 평가했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 왠지 멋지게 나온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0-;;;)



그라나다의 함락


그라나다가 함락된 3달후, 이사벨은 콜롬버스의 탐험을 지원해주는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탐험은 에스파냐에 큰 부를 가져다주게 되죠. 콜롬버스의 탐험이후 포르투갈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했으며 결국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유럽 이외 지역에 대한 권리를 나누게 되죠.



이사벨과 페르난도

그리고 콜롬버스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치하게 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이 지역을 통일된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했습니다. 특히 그라나다의 함락은 "기독교"라는 신앙적 베이스를 중요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교도들에 대한 탄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라나다가 함락된뒤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과 개종 강요가 이어지게 됩니다. 기존 추정치는 약 20만명의 유대인들이 에스파냐를 떠나 추방당했다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최대 4만명정도가 떠났으며 나머지 4만명정도는 개종햇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식의 추방은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매우 혼란한 상황을 초래한것은 분명해보일듯합니다. 

또 이런 기독교 강화 정책은 결국 그라나다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위협을 느낀 무슬림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결국 이런 상황은 1502년 무슬림들 역시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1492년 유대인 추방 명령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문제는 이제 "후계자 문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사이에서는 아들 한명과 딸 네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큰딸인 이사벨은 포르투갈로 시집보냈고 아들인 후안과 둘째딸인 후아나는 각각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매인 마르가레테와 필리프와 결혼시켰습니다. 큰딸인 이사벨은 정략결혼이었지만 행복햇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미리 사망했죠. 후에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후안 다음의 계승자인 이사벨과 결혼해서 이베리아 반도를 손에 넣으려했습니다만 이사벨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고 결국 에스파냐는 이사벨의 둘째딸인 후아나의 후손에게 상속되죠.



후안의 세례식


이사벨은 1504년 공식적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아마도 이사벨의 병이 심해져서였을듯한데 그녀는 아들 후안이 1497년 사망한것을 극복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04년 11월 사망합니다.

이사벨이 죽은뒤 카스티야의 왕위는 딸인 후아나와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사벨의 남편인 페르난도는 사위와 카스티야 문제로 껄끄러워졌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의 죽음과 아내 곁에 있는 페르난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