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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 카스티야와 레온의 이사벨 1세(세번째)

엘아라 2015. 3.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이거 네편으로 끝내고 싶은데 아마 다섯편까지 써야할듯해요..ㅠ.ㅠ


[Isabel] 카스티야와 레온의 이사벨 1세(세번째)




스티야의 이사벨 1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에스파냐의 공동군주

Isabella I 

(IsabelYsabel)

(22 April 1451 – 26 November 1504),


1474년 이사벨은 이제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의 뒤를 이어서 카스티야의 여왕이 됩니다. 하지만 카스티야는 다시한번 왕위계승문제에 휩쌓이게 됩니다.

이사벨의 오빠인 엔리케 4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후아나 사이에서는 딸인 후아나가 있었죠. 하지만 궁정에서는 엔리케 4세가 후계자를 얻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특히 첫번째 부인과의 결혼무효가 엔리케 4세쪽 문제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게 되면서 더욱더 그런 분위기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후아나는 아이를 임신했고 딸인 후아나를 낳게 되죠.  새로 태어난 왕위계승자가 사실 국왕의 딸이 아니라 국왕의 총신이었던 벨트란 드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져 엔리케가 이복동생들인 알폰소와 이사벨을 왕위계승권자로 승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카스티야의 후아나

후아나 라 벨트라녜(대충 벨트란의 딸 후아나 정도--;;)


이사벨이 엔리케 4세와 불화를 빚게 되었을때 몇몇 귀족들은 다시 후아나를 지지하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후안 파체코와 톨레도의 대주교였던 알폰소 아쿤이였습니다. 후안 파체코는 이사벨의 남동생이었던 알폰소를 왕위계승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지만, 알폰소가 죽은후 그는 후아나를 지지하게 됩니다. 특히 후아나가 그의 가문에서 양육되면서 후아나가 왕위계승자가 된다면 자신에게 더 유리할것이라 판단했었죠. 또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에 큰 역할을 했던 톨레도 대주교였던 알폰소 아쿠냐는 후안 파체코와 친척관계였었고 이에 후아나쪽을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후안 파체코가 후아나를 양육하면서 그는 후아나를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인 베리 공작 샤를과 약혼시켰습니다. 이것은 후아나의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 세력을 이용하려한것이었죠. 하지만 베리 공작은 1472년 사망했습니다. 이후 후아나는 다시 외삼촌인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역시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사실 엔리케 4세는 여동생이 자신의 승인없이 페르난도와 결혼한것에 화를 냈으며 이때문에 딸인 후아나의 계승권을 인정하려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엔리케는 명확하게 결론내리지 않았으며 여동생의 지위를 뺏지도, 후아나의 계승권을 확고하게 만들지도 않고 사망했고 이것은 다시한번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전쟁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Castillo Atalaya, desde inicio sendero a salvatierra y mina de los colores2

후안 파체코의 성


1475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조카인 후아나와 결혼하죠. 이 결혼후 후아나는 자신의 카스티야의 정당한 여왕이라고 선포하고 아폰수 5세는 아내의 권리를 들어서 카스티야를 무력으로 점령하려합니다. 하지만 아폰수 5세는 동맹인 프랑스쪽에서 원군을 보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카스티야는 다시 양쪽으로 나뉘었는데 후아나를 지지하는 측과 이사벨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아폰수는 이사벨을 지지하는 측이 자신의 생각보다 매우 컸기에 카스티야 전체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포기하고 포르투갈쪽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장악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멘도사 추기경 (아마 가운데)

 멘도사 가문은 엔리케 4세때 국왕을 지지하던 가문이었습니다만 이후 이사벨이 즉위한뒤에는 이사벨을 지지했었습니다. 추기경 역시 이사벨을 지지했는데 그는 매우 뛰어난 군인이으로 카스티야 계승전쟁시 큰 활약을했고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런 포르투갈의 공격에 이사벨의 남편은 페르난도가 서둘러 군대를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토로 전투를 통해서 카스티야는 승기를 잡게 됩니다. 토로 전투는 누가 이겼는지 좀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후퇴만 했던 아폰수와 달리 페르난도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선전했으며 이 상황은 결국 후아나 편에 섰었던 카스티야의 귀족들이 다시 이사벨측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육상전에서는 카스티야가 우위에 있었지만 해전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해전에서는 포르투갈이 카스티야 해군을 압도했었죠.



토로 전투


결국 4년동안의 계승전쟁은 1479년 알카코바스 조약을 통해서 매듭지어지게 됩니다. 지상에서 우세했던 카스티야와 해상에서 우세했었던 포르투갈의 상황을 그대로 담았는데 이 조약을 통해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통치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측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었으며 또 후아나 역시 포르투갈에서 그냥 살도록 허락받게 됩니다. 



알카코바스 조약의 첫번째 페이지


특히 카스티야는 카나리아 섬을 제외한 대서양의 교역루트를 대부분 상실했기에 카스티야의 경제적 타격은 물론 대서양에서 카스티야는 더이상 발을 붙일수 없게 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후에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콜롬버스를 지원하는 계기가 됩니다. 카스티야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포르투갈은 부유한 대서양 루트를 장악했고 이런 상황은 아마도 포르투갈이 콜롬버스의 탐험에 돈을 대지 않게된 원인중 하나였을듯합니다. 하지만 대서양쪽의 루트를 상실하고 더 이상 그쪽으로 진출할수 없게 된 카스티야는 새로운 개척지가 절실히 필요했으며 결국 콜롬버스를 후원하는 계기가 되죠. ( 이 후원으로 에스파냐 떼돈 버는 계기가 되죠. 물론 그걸 증손자인 펠리페 2세가 물쓰듯이 써서 말아먹지만 말입니다.)



콜럼버스

에스파냐의 황금기(말그대로 황금의 시대)를 이끌어준 장본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