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8)뢰번의 아델리자: 헨리 1세의 왕비

엘아라 2014. 10.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중세사는 어렵습니다.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8)뢰번의 아델리자: 헨리 1세의 왕비




뢰번(루뱅)의 아델리자

또는 아델리시아,아델라,아델이디스

잉그랜드의 왕비

아룬델 백작부인

Adeliza of Louvain

Adelicia of Louvain,

Adela andAleidis

(c. 1103 – 23 April 1151)



뢰번(루뱅)의 아델리자는 뢰번 백작 고트프리트 1세와 그의 첫번째 아내인 이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뢰번 가문은 현재 벨기에를 중심으로 하는 가문으로 후에 "브라반트 공작 가문"이 되는 가문이었습니다. 아델라이자의 아버지였던 고트프리트 1세는 뢰번과 브뤼셀의 백작이었으며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동맹자로 황제는 그에게 하 로렌 공작령을 부여해주기도 했었습니다.



뢰번 백작 고트프리트 1세의 씰


아델리자는 매우 아름다웠기에 당대에 "브라반트의 요정처녀"라고 불릴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녀에 대해서 그녀앞에서는 "보석들이 빛이 바래고, 왕관이 빛을 잃는다"라고 언급할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델라이자는 열여섯살이었던 1119년경 이미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1세와의 혼담이 오가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와의 투쟁을 하던 아델리자의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이었지만 동시에 노르망디 공작으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긴 했지만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었던 헨리 1세와의 동맹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었을듯합니다. 게다가 고트프리트는 헨리 1세의 사위였던 하인리히 5세와도 동맹관계였기에 이런 정략결혼은 꽤나 설득력있어보였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


하지만 헨리 1세가 아델리자와의 결혼을 서둘게 된것은 1120년 11월 화이트쉽이 난파하면서 유일한 남성 직계후계자였던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면서였습니다. 헨리에게는 마틸다를 제외하고는 이제 후손이 없었으며 그는 자신의 왕국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필요했고 결국 이런 상황은 아델리자와 헨리 1세의 결혼을 성사되게 만듭니다.



화이트쉽 난파와 헨리 1세



1121년 1월 헨리 1세는 아델라이자와 결혼합니다. 헨리 1세는 어린 새아내에게 빠져들게 되는데 매우 아름다웠을뿐만아니라 아델라이자 역시 샤를마뉴의 후손이었기에 첫아내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유리했엇기 때문입니다. 아델리자는 나이든 남편에게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녀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으며 헨리 1세는 젊은 아내에게 정치적으로 많이 의지했었던듯합니다. 아델리자는  왕비로써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헨리 1세는 아내에게 많은 토지를 부여해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델리자는 죽을때까지 이 재산을 소유했었기에 아마도 충분한 경제력으로 예술을 후원할수 있었던듯합니다.



아델라이자 

후대의 그림


14년간 왕비로 있었지만 아델리자는 헨리 1세가 원하던 남성후계자를 낳아주지 못했고 결국 헨리 1세는 1135년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뒤 수녀원으로 은퇴합니다. 하지만 3년뒤인 1138년 아룬델 백작인 윌리엄 도비니와 재혼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일곱아이를 낳았죠.


아델리자는 의붓딸인 마틸다를 남편의 정식 계승자로 인정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재혼한뒤 편을 바꾸게 됩니다. 마틸다는 아델리자와 그녀의 남편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했지만, 아델리자의 남편은 마틸다의 사촌인 스티븐의 충실한 신하가 됩니다. 아델리자는 처음에는 의붓딸을 지지했지만 결국 스티븐에게 굴복하게 되죠.



아룬델 성

아델라이자가 재혼후 거주했었던 성


이후 아델리자는 아마 조용한 삶을 살았던듯합니다. 1150년 아델리자는 남편 윌리엄을 떠나 수도원으로 갔는데 수도원 기록에 따르면 1151년 아델리자는 사망했다고 합니다. 도비니 가문의 직계 남성후계자는 끊어졌지만 여성후계자를 통해서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