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 무슨 정부들로 막 꼬인 족보랩니까..=0-;;
정부들과 그 후손들...(19) 샤를 드 발루아 : 샤를 9세의 아들
샤를 드 발루아
앙굴렘 공작
Charles de Valois
(28 April 1573 – 24 September 1650)
샤를 드 발루아는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샤를 9세와 그의 정부였던 마리 투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다음해에 아버지인 샤를 9세가 사망했었는데 샤를 9세는 동생인 앙리 3세에게 유언으로 아들의 양육을 부탁했고 앙리 3세는 형의 유지를 잘 따랐다고 합니다.
샤를 드 발루아의 아버지
샤를 9세
샤를은 어린시절 궁정에서 키워졌으며, 앙리 3세는 조카의 교육에 매우 신경썼었습니다. 샤를은 몰타기사단에 들어가서 서원을 했었고 1589년에는 라 셰즈 듀의 수도원장이 됩니다. 또 그는 할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부터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이 영지들 덕분에 그는 "아비뇽 백작"등의 칭호를 쓸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591년 그는 특별허락을 받고 결혼을 합니다. 그의 아내인 샤를로트 드 몽모렝시는 몽모렝시 공작의 딸로 그의 고모였던 디안 드 프랑스의 시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앙리4세 통치 초기 샤를은 전쟁에 참여하는 등 앙리 4세의 치세초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만 그의 이복여동생인 마담 드 베르뇌유(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가 앙리 4세의 정부가 되자 이에 대해서 매우 불만을 품게 됩니다. 앙리 4세는 마담 드 베르뇌유와 결혼할것처럼 이야기해놓고 결국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했고 이런 상황은 그가 앙리 4세에게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을듯합니다.
결국 그는 앙리 4세에 대한 음모에 참여하게 됩니다만 이는 곧 발각되죠. 샤를은 1605년 2월 의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만, 종신형으로 감형받은뒤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그는 1616년 루이 13세의 모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에 의해서 풀려났으며 다시 궁정에서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돌을 합니다.
샤를의 여동생
마담 드 베르뇌유
1619년 고모였던 디안 드 프랑스가 사망하면서 그는 디안이 가지고 있던 앙굴렘 공작령과 그녀의 집을 상속받게 됩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대사로 신성로마제국에 파견되었으며, 30년전쟁에도 개입했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했었던 샤를은 1643년 리슐리외가 사망한 직후에 공직에서 은퇴했었습니다.
앙굴렘 공작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는 두번 결혼했었습니다. 그중 첫번째 결혼에서 세명의 아이가 태어났으며 두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명의 사생아가 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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