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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16) 앙리 당굴렘 : 앙리 2세의 아들

엘아라 2014. 8.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레이디 플레밍의 아들인 앙리 당굴렘에 대한 자료도 잘 없고 내용도 좀 애매한 부분이 있네요..ㅠ.ㅠ

역시 사생아 아들이라서 기록이 좀 모호한듯..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16) 앙리 당굴렘 : 앙리 2세의 아들




앙리 당굴렘

앙굴렘 공작

Henri d'Angoulême

"Henri, bâtard de Valois"

"Henri de France"

 (1551 – 1586


앙리 드 프랑스 등으로 불리는 앙리 당굴렘은 1551년 앙리 2세와 그의 정부였던 레이디 플레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때 49살이었습니다. 앙리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에게서 "앙굴렘 기사"지위를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앙리가 아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그가 프랑스에서 자랄수 없게 했었을듯합니다.


레이디 플레밍은 단순히 앙리 2세의 정부가 된것이 아니라 디안 드 푸아티에의 반대 세력이 그녀를 정부로 만들려고 햇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궁정에서는 이런 시도들이 자주 있었는데 여기에 가담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 드 몽모렝시였다고 합니다. 물론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이를 묵인했을겁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성공하지 못했고 레이디 플레밍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했습니다. 후에 레이디 플레밍이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갈수 있게 스코틀랜드의회에 탄원했던것으로 봐서 1560년까지 앙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성장했었던듯합니다.



앙리의 어머니

레이디 플레밍


이후 앙리는 프랑스로 갔는데 당시 국왕이었던 앙리의 형인 프랑수아 2세와 그의 왕비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레이디 플레밍에 호의적이었고 역시 앙리에게도 호의적이 됩니다. 이후 앙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는데 프랑스에서 여러 지위를 가지게 되죠. 또다른 형인 앙리 3세가 국왕이 되면서 앙리 3세가 가지고 있던 앙굴렘 공작 지위를 그가 받게 됩니다. 


앙리는 기사였는데 특히 메리 여왕이 국내 문제로 잉글랜드로 망명해야했을때 앙리는 메리를 돕기 위한 프랑스쪽 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그는 메리 여왕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었는데 그와 메리 여왕은 사촌관계(그의 어머니인 레이디 플레밍과 메리 여왕의 아버지인 제임스 5세가 이복 남매간이었습니다.)였던것과 어린시절 메리 여왕의 호의를 입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앙리와 프랑스측 병사들은 스코틀랜드로 가지 못합니다.



첫번째 남편의 상복을 입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앙리는 가톨릭교도로 키워졌으며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기에 위그노 전쟁때 신교도들에 대항해서 전투를 했었습니다. 앙리는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때도 참여했으며 또 라로셰 포위때 매우 큰 활약을 했으며, 오년간에 걸친 메네르브 포위 공격의 사령관이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앙리는 프로방스 지방의 주지사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라 로셰 포위공격



앙리는 다른 많은 스코틀랜드 왕가 사람들처럼 문학적 재능이 었으며 그는 여러편의 소네트를 썼다고 합니다. 또 그는 비서로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프랑수아 드 말레브를 자신의 식솔로 들여서 비서로 쓰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수아 드 말레브


앙리는 1586년 엑상프로방스에서 카스텔란 백작인 필립 알토비티와 결투후에 사망합니다. 카스텔란 백작의 아내는 르네 드 리외로 앙리 3세의 정부이자 매우 아름다웠던 여성으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것을 우려해서 르네를 궁정에서 추방했었습니다. 그녀는 두번 결혼했었는데 두번째 남편이 카스텔란 백작이었죠. 하지만 결국 이 아름다운 여성을 두고 앙리와 르네의 남편은 결투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결투 결과 카스텔란 백작은 사망했으며 앙리 역시 중상을 입어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뒤 앙굴렘 공작 지위는 누나인 디안에게 돌아갑니다.



르네 드 리외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