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앙리 2세도 정부가 무척 많던데 자료가 많이 없군요..아하하하..-0-;;
그런데 이분이랑 이집 아들이랑은 자료들이 조금씩 어긋나네요.
이리저리 끼워 맞춰보는데.....-0-;;;
역시 어디 책을 읽어야하는데 인터넷으로 자료 찾는건 한계가 있는듯해요.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15) 자넷 스튜어트 : 앙리 2세의 정부
자넷 스튜어트
레이디 플레밍
Janet, Lady Fleming
Janet Stewart
(17 July 1502 – 20 February 1562)
제인 또는 제니 등 다양한 버전의 이름으로 알려진 레이디 자넷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그의 정부였던 이사벨 스튜어트의 딸로 그녀 역시 국왕의 사생아였습니다. 이사벨 스튜어트는 제임스 4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3세와 사촌관계였는데 이사벨의 할머니인 레이디 조앤 보퍼트가 남편 제임스 1세가 죽은뒤 재혼한 남자가 바로 이사벨의 할아버지였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
자넷 스튜어트의 아버지
레이디 자넷은 3대 플레밍경이었던 말콤 플레밍과 결혼했고 그와 결혼한뒤 "레이디 플레밍"으로 불렸었습니다.자넷과 말콤사이에서는 모두 여덟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플레밍경은 1547년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뒤 레이디 플레밍은 궁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왕가에는 적자는 유일하게 제임스 5세의 딸이자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비록 서자였지만 레이디 플레밍은 제임스 5세의 누이였으며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마리 드 기즈가 딸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 중 하나였었죠. 레이디 플레밍은 어린 조카의 가정교사나 보모로 궁정에서 일했으며 레이디 플레밍의 막내딸이자 메리 여왕과 같은 나이의 메리 플레밍은 여왕의 놀이상대이자 시녀가 되죠.(메리 여왕의 시녀 넷이 모두 메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메리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마리 드 기즈
154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약혼자가 있는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져서 교육받게 됩니다. 이때 보모였던 자넷과 여왕의 시녀였던 메리 역시 어린 여왕과 함께 프랑스 궁정으로 가게 되죠. 레이디 플레밍은 프랑스어를 거의 못햇으며 스코틀랜드어만 했기에, 여왕이 아팠을때 프랑스 의사와 보모인 레이디 플레밍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궁정에서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던 레이디 플레밍은 곧 앙리 2세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녀가 앙리 2세에게 소개 받은것은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레이디 플레밍은 디안 드 푸아티에처럼 아름답고 교양있었으며 나이도 많았죠. 아마 연상의 여성이 취향이었던 앙리 2세에게는 꽤나 괜찮은 상대였으며 디안 드 푸아티에를 경계하던 궁정 인물들은 그녀가 디안 드 푸아티에를 대신할수 있을거라 기대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레이디 플레밍과 잠시 만났던 앙리 2세는 다시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돌아갔죠.
앙리 2세
레이디 플레밍은 앙리 2세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1551년 그의 아들을 낳았습니다.(..엉-0-;;;연세가..) 레이디 플레밍은 아이를 낳은후에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졌는데 아마도 앙리 2세가 다시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돌아가서였을듯합니다. 레이디 플레밍은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살았었던듯합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에서 레이디 플레밍의 지위가 미묘한 상황이 되게 만듭니다. 메리 여왕의 어머니였던 마리 드 기즈는 기즈가문 출신으로 디안 드 푸아티에는 기즈 가문과 가깝게 지냈죠. 이때문에 레이디 플레밍의 존재는 기즈 가문에 득이 되지 않았으며, 결국 레이디 플레밍을 기즈 가문와 연결되는 신하와 결혼시키려합니다. 하지만 레이디 플레밍은 이를 원치 않는데 후에 마리 드 기즈는 레이디 플레밍이 다시 프랑스로 가서 앙리 2세를 만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스코틀랜드에서 못떠나도록 했다고 합니다.
레이디 플레밍은 1560년 마리 드 기즈가 죽은뒤 그녀의 시신 에든버러 성으로 옮겨졌을때 왕비를 위해 기도하던 인물들중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마리 드 기즈가 죽은뒤 레이디 플레밍은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갈수 있도록 스코틀랜드의회에 탄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프랑스 국왕이었기에 메리 여왕은 프랑스 왕비이기도 했었죠. 메리는 자신의 어린시절 보모를 매우 환영했으며 프랑수아 역시 레이디 플레밍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에 그녀의 아들인 앙리 역시 호의적 대접을 받았습니다. 레이디 플레밍은 1562년 사망했습니다.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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