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53)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6세의 왕비(네번째)

엘아라 2014. 8.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

영국의 왕비들...(53)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6세의 왕비(네번째)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영국의 엘리자베스 왕비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4 August 1900 – 30 March 2002) 


이제 왕비가 된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함께 의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녀 역시 시부모처럼 아이들을 떼어놓고 여러나라를 다녀야했었죠. 유럽과 캐나다등을 순방했었고 공식행사를 힘들어하는 남편을 늘 받쳐줬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훗날 부모의 해외순방에 따라가면서 아버지가 지쳐서 짜증을 내는 모습이나 그런 남편에게 주의를 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의무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왕부부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야했는데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스캔들로 퇴위했고 이런 문제는 영국에서 왕가가 지속될수 없을수도 있다는 걱정을 증가시키는 일이었죠. 하지만 그들의 충실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2차 세계대전때였습니다. 사실 국왕 부부는 전쟁을 원치 않았으며 어떻게든 전쟁을 하지 않으려했던 챔벌린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챔벌린은 물러냐야했으며 결국 전쟁이 시작되죠. 전쟁이 일어나면서 국왕부부는 자신들의 의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합니다.



1939년 투어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어려움에 직면하죠. 특히 독일의 영국 공습은 영국민들의 삶을 엄청나게 힘들게 했었습니다. 폭격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이런 상황은 영국 사람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으며 삶을 힘들게 했습니다. 폭격으로 집도 사라지고 일터도 없어진 사람이 많았고 폭격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기도 햇었죠. 런던이 폭격당하게 되자 영국 정부는 왕비에게 자녀들과 함께 런던을 떠나거나 공주들만이라도 캐나다로 보내라고 이야기했지만 왕비는 이를 거절합니다. 왕비는 "우린 아이들을 우리없이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나는 국왕 곁을 떠나지 않을것이고, 국왕께선 절대 런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제안을  거절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폭격당할 두려움에 늘 살던 영국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이었죠. 국왕과 왕비 역시 국민들과 함께 위험을 같이 했으며 폭격당한 사람들을 늘 방문하고 만남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줬었었죠. 왕비는 사람들을 만나러 갈때면 늘 최고로 좋은 복장을 했었다고 합니다. 왕비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왕비를 만나러 올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오기에 자신도 가장 좋은 옷차림을 해야하는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국왕부부는 밤에는 런던에서 떨어진 윈저성에서 쉬긴했지만 일과의 대부분을 버킹엄 궁전에서 보냈으며 이때문에 자주 폭격당한 버킹엄 궁전에서 목숨의 위험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2차대전중에 국왕부부의 인기는 높아졌으며 특히 늘 국왕 곁을 떠나지 않는 왕비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폭격 당한 런던 시민들을 만나는 국왕 부부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게 됩니다. 국왕 부부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지만 정치적 문제는 복잡하게 됩니다. 전쟁후 이제 수많은 영국의 식민지-특히 인도가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죠. 또 정치적인 문제 말고도 가족들간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부부의 큰딸이자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 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된것이었죠. 엘리자베스는 꽤 오래전부터 친척이었던 그리스의 필립 왕자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리고 둘을 엮기 위해 필립의 외가(밀포드헤이븐 후작가문과 루이스 마운트배튼경)과 친가(그리스 왕가 특히 필립의 사촌이자 여왕의 숙모였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가 모두가 열심이었죠. 나이차가 좀 있었기에 필립은 처음에는 공주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지만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만 국왕부부는 처음에는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딸이 외국인의 무일푼 왕족보다는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귀족과 결혼하길 바랫다고 합니다. 게다가 필립의 누나들은 모두 독일인과 결혼했으며 필립은 그리스의 왕자였고 덴마크 국왕의 증손자이긴했지만 그의 원래 가문은 독일이 뿌리였고 이때문에 다른 당시 많은 영국인들처럼 반 독일 감정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는 그다지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었죠. 게다가 필립 왕자는 어린시절 부모가 별거한뒤로 거의 누나들 집이나 외할머니의 집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았기에 이런 상황 역시 엘리자베스 왕비로써는 그렇게 탐탁치 않았을 상황이었던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국왕 부부는 둘의 결혼을 승락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6년 국왕 부부는 딸과 필립의 결혼을 승락합니다. 하지만 공식 약혼 발표는 공주의 21번째 생일 이후에 하기로 하죠. 그리고 공식발표전인 1947년 2월 필립의 영국귀화신청이 받아들여집니다. 아마 외국인과 공주가 결혼하는 것에 부담이 될것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는 이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가 아니라 그냥 해군 중위 필립 마운트배튼이 됩니다. (물론 훗날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지1세가 영국 국왕이 되면서 영국 의회는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 선제후비"의 후손들은 자동적으로 영국의 국민으로 인정한다라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 법안에 따르면 필립 역시 소피아 선제후비의 후손-외할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으로 굳히 귀화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결혼 직전 왕실 가족 사진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 사윗감을 처음에는 못마땅해했는데 왕비는 초기 전기 작가들에게는 필립에 대해서 "훈족(야만인이라는 의미로 독일인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했습니다.)"이라고 언급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비는 훗날 다른 전기작가에게 필립에 대해서 "영국 신사"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은 1947년 11월 결혼했으며 둘의 장남인 찰스는 1년후에 태어납니다. 찰스가 태어났을때 왕실 가족들 모두가 기뻐했는데 국왕 부부는 물론 공주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나 필립의 외할머니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헤센의 빅토리아) 역시 언젠가 국왕이 될 이 증손자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 외손자인 찰스가 태어났을때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엘리자베스 2세 공식 전기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http://www.telegraph.co.uk/news/picturegalleries/royalty/9176069/The-Queen-Mother-in-pictures.html?frame=2181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