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51)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6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14. 8.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제가 가쉽성 기사를 많이 안 좋아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흥미위주로 이야기하고 대충 "아님 말고"라고 하기 때문이라죠. 이런 이야기들은 일명 "증권가 찌라시"라는 것과 비슷해서 사실도 있지만 거짓이나 과장된 이야기도 많고 그것을 사실과 교묘하게 섞어놓기 때문에 더욱 믿을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영국 왕가의 스캔들 이야기도 보면 이런식의 비슷한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처음 읽었던 살아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다이애나가 죽고나서 얼마되지 않아서 영국 왕실의 이미지가 마구 흔들릴때 나온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아님 말고"라는 식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났다죠.--;;

그뒤로는 가쉽성은 잘 안 읽습니다. 차라리 그때 이슈를 지나치더라도 나중에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보는 편이 더 낫더라구요.(게다가 결정적으로 전 살아있는 사람은 관심이 없으니....--;;;)


퀸마더 이야기도 보면 이런 가쉽성기사가 엄청나게 많더군요. 특히 윈저공작부부와 얽혀서는...-0-;;;;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런듯은 하지만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죽은지 한 30년은 지나야 사람들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에 뭐랄까 좀 난감하다죠..(뭐 사실 뒷담화가 재미있긴하죠...--;)


영국의 왕비들...(51)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6세의 왕비(두번째)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영국의 엘리자베스 왕비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4 August 1900 – 30 March 2002) 


레이디 엘리자베스 역시 다른 귀족 여성들처럼 사교계에 나가서 여러가지 활동을 했었습니다. 당시 귀족이나 왕족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것은 남편찾기였으며 아마도 레이디 엘리자베스도 결혼을 고민했을것입니다. 1920년 20살이었던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알아왔었던 앨버트 왕자였죠.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앨버트 왕자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둘째아들이자 웨일즈공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해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소심하고 예민했지만 부모처럼 의무에 충실했던 왕자는 혼기가 되자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자베스를 만난뒤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조지 6세

앨버트 왕자


1921년 앨버트 왕자는 레이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합니다. 하지만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거절 이유는 왕족으로 의무에 매여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앨버트는 포기하지 않았고 어머니인 메리 왕비에게 엘리자베스 외에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이에 메리 왕비는 엘리자베스를 불러 따로 만났었는데 그녀를 본 메리 왕비는 "버티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 소녀"라고 이야기했었지만 아들과 결혼을 성사시키지는 못합니다.

1922년 엘리자베스가 앨버트의 여동생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결혼 들러리가 되었을때 앨버트와 엘리자베스는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결혼 다음달인 1922년 3월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청혼합니다만 엘리자베스는 두번째 청혼 역시 거절합니다. 두번의 거절에도 앨버트는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1923년 1월 엘리자베스는 왕족으로써의 삶을 걱정했지만 앨버트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결혼식

신랑 옆에 서있는 들러리가 엘리자베스 왕비입니다.


둘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매우 환영받는것중 하나였는데 비록 귀족의 딸이긴 햇지만 엘리자베스는 영국인으로 외국인이나 외국 왕족이 아니었기에 당시 영국 분위기에서 이런 결혼은 환영받았었습니다. 이 결혼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신랑을 제외하면 아마도 신랑 부모였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였을것입니다. 둘의 자녀들은 딸인 메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혼이었으며 특히 왕위계승자였던 웨일즈공은 바람둥이로 이름이 높았기에 늘 스캔들을 우려했던 국왕 부부에게 근심거리였죠. 이때문에 둘째아들인 버티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안정적 생활을 하게 된것을 매우 기뻐했었다고 합니다. 



약혼사진


결혼후 앨버트는 요크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는 이제 요크 공작부인으로 불리게 되죠. 부부는 결혼뒤에 왕족으로써 의무를 수행합니다. 여러곳을 방문했으며 연설을 해야했죠. 하지만 요크 공작은 어려서부터 말을 더듬었으며 이것은 연설이 필수인 왕족에게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그는 1925년 연설이후 언어치료사를 고용했고 언어치료를 통해 말 더듬는것을 고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영화 "King's speech"입니다.

부부는 왕족으로써 영국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햇는데 그중에서 하나는 당시 제국이었던 영국 내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는 일도 포함되어있었으며 아이를 떼어놓고 가야하는 일이었지만 의무로써 수행했었죠. 하지만 후에 엘리자베스는 어린 딸을 떼어놓고 가는 것이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투어중


요크 공작부부는 1926년 첫째아이인 딸 엘리자베스를 얻게 됩니다. 이 아이는 조지 5세의 첫번째 손주로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무척이나 기뻐했으며 이 손녀를 너무나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4년후인 1930년에는 둘째딸인 마거릿 로즈를 낳죠. 이후 부부는 아이를 더이상 갖지 않는데 요크 공작부인은 두딸을 모두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당시에는 제왕절개를 세번이상할경우 산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왕비의 두딸들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


요크 공작부인으로써 엘리자베스는 오래도록 동서들이 없던 왕실에서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던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며느리를 조지 5세 부부는 무척이나 예뻐했는데 늘 엄격한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에게 늘 사랑받는 며느리였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http://britishroyalty.tumblr.com/page/35

http://www.telegraph.co.uk/news/picturegalleries/royalty/9176069/The-Queen-Mother-in-pictures.html?frame=2181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