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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비들...(48)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일곱번째)
테크의 메리
영국의 메리 왕비
Mary of Teck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 26 May 1867 – 24 March 1953)
메리의 아들이자 이제 영국의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이 사귀고 있었던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길 원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스캔들감이었는데 월리스 심슨은 미국출신의 이혼경력이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국왕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녀는 또다시 이혼을 한뒤 결혼해야했죠.
에드워드는 강경하게 결혼을 원합니다만 많은 이들이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특히 어머니 메리 왕비는 아들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일부 정치가들은 평민출신의 미국여성이 국왕의 아내가 되는것도 괜찮다고 봤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는 월리스 심슨이 왕비로 대관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귀천상혼 형태의 결혼도 괜찮다는 것이었죠.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슨
하지만 이문제는 복잡했는데 영연방내 국가들에서 이 결혼을 반대했으며 종교적 문제도 걸리게 됩니다. 메리는 영국 국교회 수장인 영국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결국 수상은 국왕이 심슨 부인과 결혼하려면 국왕직에서 그만 두던가 아니면 결혼을 포기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왕위를 동생인 요크 공작에게 양위하죠.
이 상황은 메리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평생 왕실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그녀에게 양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죠. 국왕인 아들은 왕위에 있는 것이 의무임에도 심슨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의무를 거부한것이라고 여겼고 메리는 평생 아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아들이 의무를 저버리게 만든 심슨부인도 용서하지 않았죠. 에드워드는 "윈저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두번째 이혼한 월리스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메리는 이후 죽을때까지 큰아들 부부를 만나지 않았으며 이런 제의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말입니다. (아마 영국 여왕이 절대 양위하지 않을거라는 말은 아마도 여왕이 할머니인 메리 왕비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에 메리 왕비의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을거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일듯합니다. )
메리 왕비의 둘째아들 요크 공작 부부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
메리 왕비는 이제 둘째 아들이 영국의 국왕 조지 6세가 되는 것을 지켜봅니다. 일반적으로 선대 국왕의 아내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것이 그때까지 관례였었습니다만 메리 왕비는 아들의 즉위식에 참석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메리 왕비는 국왕의 어머니로써 여러가지 의무를 수행합니다. 특히 메리 왕비는 두 손녀들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로즈 공주의 양육에 매우 신경썼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린시절 피렌체의 여러 박물관에서 영감을 얻었던것처럼 손녀들도 그러길 바래서 런던의 여러 박물관이나 갤러리들을 함께 다니고는 했었다고 합니다. 또 메리 왕비는 손녀들이 왕족으로써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도 알려줬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어릴때 신하에게 함부로 대하자 메리 왕비는 손녀를 매우 야단쳤으며 직접 사과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엘리자베스는 늘 할머니를 사랑했다고 하죠. 메리 왕비는 아들부부가 의무로 자리를 비울때 시부모가 그랬던것처럼 두 손녀를 돌봐줬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 부부처럼 애들이랑 정신없이 놀아주시진 않았겠죠.^^;;)
두 손녀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와 함께 있는 메리 왕비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조지 6세는 어머니가 좀더 안전한 곳에 있길 바랍니다. 런던은 쉴세없이 폭격당하고 있었고 국왕 부부는 런던을 떠나길 거부햇었는데 메리 왕비 역시 함께 의무를 수행하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메리 왕비는 조카인 보퍼트 공작부인의 집으로 옮겨갔는데 문제는 메리 왕비의 시중드는 사람들때문에 공작부부의 저택에 공간이 매우 비좁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메리 왕비에게 불평할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죠. ^^;;;;
메리왕비는 1차대전때처럼 할수는 없었지만 왕족으로써 병사들을 방문하고 사기를 북돋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1942년 공군이었던 넷째아들 켄트 공작 조지는 비행기 추락으로 임무중 사망했었죠.
그리고 메리는 1945년 독일이 패망한뒤에서야 런던으로 돌아왔었습니다.
레이디 메이 캠브리지
보퍼트 공작부인 메리
메리 왕비의 조카
메리 왕비는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고 경제적 관념도 뛰어났는데 이때문에 방만하게 운영되던 영국 왕실 재산을 좀더 명확하게 운영될수 있었을수도 있습니다. 메리는 여러가지를 수집했는데 특히 가문과 관련된 보석들을 매우 많이 모았습니다. 메리 왕비는 러시아 황실측 보석을 많이 사모았는데 이때문에 자주 싼값에 친척들의 보석을 사들였다고 비난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혁명이후 많은 황실가족들과 귀족들이 탈출했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가져온 보석들을 팔면서 보석들의 시세가 땅에 떨어졌었다고 합니다. 메리 왕비는 그나마 시세보다는 비싸게 사줬었다고 합니다. 현재 영국 왕실의 보석들중 많은 것들이 메리 왕비가 수집한것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여왕이 자주 쓰고 나오는 블라디미르 티아라는 메리 왕비가 블라디미르 대공비의 가족들에게서 산것입니다. 여왕이 자주 했었던 마리야 황태후의 브로치의 경우 러시아측에 반환했는데 황태후의 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가 황태후에게 결혼선물로 줬던 의미있는 브로치라고 합니다.
또 메리는 왕실에서 오래도록 신하들에게 빌려준 물건들을 효율적으로 찾아오도록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만들었고 이 장부를 토대로 신하들에게 물건들을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1952년 메리의 아들인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손녀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왕비는 세아들을 잃었으며 이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죠. 왕비는 자신이 손녀의 대관식을 못볼것을 우려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약 대관식전에 죽을 경우 애도기간때문에 대관식이 연기되는일없이 미리 정해진 날짜에 치루라고 유언장에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녀의 대관식 10주전인 1953년 3월 암으로 사망합니다. 왕비의 관이 일반에 공개됐을대 많은 이들이 왕비를 추모하기 위해 왔었으며 그녀는 윈저성의 남편곁에 묻혔습니다.
메리 왕비의 장례식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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