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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비들...번외편 (13)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네번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Francis Albert Augustus Charles Emmanuel)
later The Prince Consort
(26 August 1819 – 14 December 1861)
1848년
초기 칼라 사진은 칼라로 찍는다기 보다는 흑백 사진에 색깔을 입히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19세기 말무렵의 사진은 매우 정교하게 색을 입히기도 하더라구요.(예전에 내셔널지오그래피 100주념 기념 특집호에서 사진 봤는데 놀랍더라구요.)
영국에서의 앨버트의 삶은 점차 나아져갔지만 오래도록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빅토리아 여왕 즉위초기 여왕이 멜버른경을 편애했었던것과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의 불화때문에 여왕이 인기가 없었던것이 원인이었을것입니다. 여왕은 멜버른 경을 과도하게 의지했으며 이때문에 멜버른경의 정적들이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또 여왕은 켄트 공작부인과의 불화가 극심했는데 이 때문에 여왕은 어머니와 그 측근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졌었죠. 특히나 켄트 공작부인의 시녀중 하나가 병을 앓았는데 여왕은 그 시녀가 "임신"했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의사가 이를 확인하게 만들기까지 했죠. 이 사건은 사람들이 여왕이 "인정머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이런 상황은 여왕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여왕에 대한 암살시도로 이어지게 되죠.
이전에 1840년 암살 시도 이후 1842년에도 또 암살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왕과 앨버트 공이 그때까지도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생활은 국민들이 공감할만한 것이었기에 점차적으로 인기를 얻어가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
1847년
빈터할터
앨버트는 차츰 여러가지 일들을 하면서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결혼초기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었기에 먼저 왕실 내부의 일에 먼저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는 이제까지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었던 왕실의 재정을 개혁합니다. 이전까지 왕실 재정은 매우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앨버트는 왕실 영지를 관리했는데 특히 윈저나 콘웰 공작령에 신식 농장등을 건설해서 새로운 농법등을 시험했었습니다. 또 구식의 왕궁대신 여왕과 아이들과 함께 가족 생활을 할수 있는 집을 만드는데 바로 와이트 섬에 당시 최신식 집이었던 "오스본 하우스"를 건설했었죠.
오스본 하우스
앨버트는 차츰 정치적 권력을 얻기 시작하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로버트 필을 지지했었습니다. 로버트 필을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역시나 자유주의를 지지했었던 앨버트는 그와 정치적인 의견이 잘 맞았었던것이죠. 앨버트가 필을 지지하면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도 점차 확대되는데 이미 앨버트는 여왕의 공문서를 모두 열람할수 있었으며 여왕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가 되어있었죠. 뿐만 아니라 그는 여왕과 함께 내각회의에 참석했으며 여왕의 부재시에도 내각회의에 참석하는등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왕은 점차 남편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앨버트는 1847년 캠브리지 대학 총장이 됩니다. 이때 그는 영국의 교육 시스템 전반에 대해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대학에서 역사나 고전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현대 역사등을 가르치므로써 대학 교육을 현대적으로 바꿨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적 성향과 일련의 개혁활동은 앨버트에게 자연 과학과 산업기술 발달에 매우 관심을 많이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그가 1851년에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박람회가 남편이 마련한 것이라면서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1851년 세계 박람회 개회식
여기에 여왕과 앨버트공 그리고 가족이 참석했습니다.
앨버트는 이제 영국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여왕의 남편이자 중요한 정치적 조언자로써 여러가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만, 가끔 의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특히 국제문제에 있어서 앨버트는 독자적인 관점이 있었지만 영국 의회는 그것이 영국에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기도 햇었고 이때문에 마찰을 빚었던 것이죠.
또 앨버트는 교회와도 마찰을 빚게 되는데, 그의 자연과학과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과학 이론등에 열광하게 했었으며 진화론같은 혁명적 이론에도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앨버트는 "종의 기원"이 나온뒤 다윈에게 기사작위를 주자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는 이에 대해서 반대했었죠.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국왕 가족들과 함께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 그리고 그 자녀들
가운데의 여성이 여왕이고 그 옆이 앨버트 입니다.
루이 필리프의 며느리중 느므르 공작부인이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촌이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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