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번외편 (12)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세번째)

엘아라 2014. 2.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의 왕비들...번외편 (12)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세번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Francis Albert Augustus Charles Emmanuel)

 later The Prince Consort

(26 August 1819 – 14 December 1861)

1845년



결혼초 앨버트는 무척이나 고립되어있었으며 정치적 권력도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정치보다는 자신의 관심분야였던 학문에 대해서 좀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었고 이에 노예 금지제에 대한 협회를 만들었으며 여기에 회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또 왕실 농장에서 농장 경영에 대한 여러가지 실험을 하거나 말들을 키우고 번식시키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죠. 그가 정치적으로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은 그의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이 임신하고 출산을 하면서입니다. 몸이 무거워져가는 아내를 위해 서류작업을 도와주는 형태로 그의 정치적 의무는 시작되게 됩니다. 게다가 1840년 6월에 일어난 여왕 암살 미수 사건은 앨버트의 역할에 대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만듭니다. 


1840년 6월 10일 오후 임신중인 여왕과 앨버트공은 버킹엄 궁전 근처에서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에드워드 옥스퍼드라는 인물이 나와 여왕과 앨버트공을 향해 두발의 총을 발사했습니다. 여왕과 앨버트공은 둘다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에드워드 옥스퍼드는 곧 체포됩니다. 다음날 신문에는 여왕이 무사한것과 앨버트공의 침착한 대처에 대해서 기사가 났었죠. 이런 그의 행동은 앨버트에 대한 대중의 호의를 이끌어냈으며 이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어느정도는 인정하게 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1840년 8월 의회는 여왕이 후계자가 성인이 되기전에 사망할 경우, 앨버트공이 섭정이 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에드워드 옥스퍼드의 빅토리아 여왕 암살 미수

여왕의 마차 앞쪽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옥스퍼드입니다.

마차에 여왕과 앨버트 공 둘이 타고 있구요.


정치적인 면에서는 어느정도 인정을 받게 된 앨버트는 이제 가정생활에서도 고립감을 벗어나야했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여왕은 자신의 가정교사인 레첸 여남작에게 의지했었습니다. 빅토리아의 어린시절은 매우 힘들었는데 야심가였던 존 콘로이는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에게 큰 영향을 줬고 공작부인은 딸을 고립되게 키웠습니다.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가 여왕이 되었을때 자신이 권력을 손에 넣길 원햇고 이때문에 여왕에게 자신의 아이들만 놀이 상대로 두게 했으며, 켄트 공작 부인이 섭정이 되게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여왕은 불만을 가졌으며 저항하려했습니다만, 어린 소녀였던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존 콘로이에게 대항할만한 힘이 없었죠. 이런 빅토리아가 그들에게 대항할수 있게 곁에서 의지처가 된 인물이 바로 가정교사였던 루이제 레첸이었습니다. 

빅토리아가 여왕이 된뒤 존 콘로이는 궁정에서 은퇴해야만 했지만 레첸은 여왕의 식솔로 여왕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그리고 레첸은 이제 여왕에게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인물이었던 앨버트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제 레첸

레첸 여남작


이런 상황은 부부사이의 불화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첫째아이인 빅토리아가 태어난뒤에는 더욱더 문제가 됩니다. 앨버트는 딸을 끔찍히도 아끼고 사랑했는데 그는 아이의 양육에 매우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레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아이를 돌볼 사람을 뽑았는데 앨버트는 그 사람들을 반대했었습니다.

결국 어린 빅키가 아프게 되자 앨버트는 아이가 아픈것에 걱정했지만 아이를 돌보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죠. 결국 빅키가 심각하게 아프게 되자 문제가 발생했는데 앨버트는 레첸을 비난햇으며 여왕은 그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앨버트는 화를 내면서 자긴 그러면 아이 돌보는데서 손을 떼겠다고 하면서 여왕에게 아이가 죽는다면 여왕의 책임이 될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여왕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겼고 빅키는 건강을 되찾게 됩니다. 이후 레첸은 궁정을 떠나 고향인 하노버로 돌아갔으며 여왕은 그녀에게 연금을 지급해줬다고 합니다.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1842년

빈터할터


레첸이 떠난 뒤 앨버트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아내와 장모를 화해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여왕과 켄트 공작부인의 불화는 둘이 각각 레첸과 콘로이의 영향을 받아서 생겼던 마찰이었는데 이 둘이 궁정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갈등의 요소는 많이 사그라지게 되었죠. 그리고 앨버트는 이런 상황에서 아내와 장모를 화해시켰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