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15) 모데나의 마리아 : 제임스 2세의 왕비(네번째)

엘아라 2013. 6.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지막이군요..

제가 사실 스튜어트 가문이랑 튜더 가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현재도 그렇구요. 잉글랜드사 중에 제일 관심없는 파트인데...

중요한것은 제일 많이 책을 읽은것이 튜더 시대랑 스튜어트 시대라는...ㅠ.ㅠ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책도 읽었고,심지어는 제임스 1세 전기도 읽다가 말았다는..ㅠ.ㅠ 튜더가문은 메리 여왕에 대한 당대 기록 모음..이런것도 지나가다 봤었다죠..-0-;;;)


흠...별 관심없다고 했는데 왜 난 저 시대 책들을 많이 읽은 것인가..ㅠ.ㅠ



영국의 왕비들...(15) 모데나의 마리아 : 제임스 2세의 왕비(네번째)




모데나의 마리아

마리아 베아트리체 안나 마르게리타 이사벨라 데스테

잉글랜드의 메리 왕비

Mary of Modena

(Maria Beatrice Anna Margherita Isabella d'Este)

( 5 October [O.S. 25 September] 1658 – 7 May [O.S. 26 April] 1718) 

1690년대


루이 14세는 사촌인 제임스 2세에게 생 제르멩에 있는 성을 내어줍니다. 이곳에서 제임스 2세는 망명정부를 세웠으며 딸과 사위에 대항하게 되죠. 

메리는 루이 14세의 궁정인 베르사유에 자주 방문했었으며, 이곳에서 매우 환대받던 인물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위트있고 아름다웠기에 인기가 높았었죠. 메리는 루이 14세의 며느리인 도피느(바이에른의 마리 안 빅투아르)와는 친하지 못했는데 예의에 민감했던 베르사유에서 "왕비"였던 메리의 지위는 "왕위계승자의 부인"인 도피느보다 더 높은 지위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도피느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았던 메리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었다고 합니다. (루이 14세의 왕비는 죽고 없었기 때문에 당시 베르사유에서 공식적으로는 도피느보다 더 높은 지위인 여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루이 14세와 그의 귀천상혼한 부인인 마담 드 맹트농과는 매우 친한 사이가 됩니다. 메리가 베르사유에서 잘 적응하고 있었던 반면, 메리의 남편인 제임스 2세는 베르사유에 잘 적응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농담으로 제임스 2세와 이야기해보면 그가 왜 왕위에서 쫓겨났는지 알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임스 2세

1690년대


제임스는 1689년 아일랜드로 가서 다시 왕위를 찾으려했습니다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죠. 메리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병사들과 배를 보냈습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보석들을 팔정도였죠. 그리고 군사적 시도가 실패한후, 메리는 여전히 돈문제로 골치아팠는데 제임스 2세를 지지해서 프랑스로 망명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메리와 제임스는 자신들의 개인 재산을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의 시도가 실패한뒤, 메리는 친청인 모데나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녀는 동생인 모데나 공작의 결혼에 신경을 썼으며, 동생이 죽은뒤에는 삼촌이자 유일한 남성 직계 후계자였던 리날도의 결혼등에 집중하게 되죠.(리날도는 원래 추기경이었는데 조카가 죽은뒤 환속해서 가문의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숙부는 메리가 물려받은 유산과 혼수를 지급하지 않고 버텼고 한참 후에나 겨우 지급햇는데 그것도 다 지급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모데나 공작은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황제는 루이 14세의 정적이었으며 이때문에 메리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리날도 데스테

메리의 숙부이자 모데나 공작령의 후계자


1701년 남편인 제임스 2세가 죽고 미성년이었던 아들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3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8세로 선포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이었을뿐 실제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던 인물은 제임스 2세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윌리엄 3세였죠. 이때문에 메리의 아들은 후에 제임스 3세라는 이름보다는 "올드 프리텐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됩니다. 메리는 미성년 아들의 섭정으로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만, 그녀는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더 중요한것은 그녀의 아들은 이름뿐인 국왕이었었죠.

윌리엄 3세의 치세가 끝나가게 되자, 잉글랜드의 귀족들중 일부는 다시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올드 프리텐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죽자, 스코틀랜드쪽 귀족중 일부는 제임스를 다시 국왕으로 추대하려합니다. 그리고 메리에게 제임스가 스코틀랜드로 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섭정으로써 메리는 아들이 스코틀랜드에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스코틀랜드에서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올드 프리텐더

메리의 아들이자 웨일즈 공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

1705년


메리는 아들인 제임스가 성인이 된뒤, 파리 근처의 수녀원으로 은퇴합니다. 메리는 그곳에서 루이 14세의 정부였으며 이때는 수녀가 된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만났으며 그녀와도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하지만 1711년 상황은 매우 안 좋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결국 위트레히트 조약을 통해서 올드 프리텐더의 계승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결국 올드 프리텐더는 프랑스를 떠나야만했죠. 그리고 1712년 막내딸인 루이즈 마리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메리는 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메리는 가족들이 없었지만 여전히 생제르맹과 파리근처의 수녀원을 오가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메리에 대해서 프랑스에 있던 친구들은 매우 호의적으로 여겼는데, 루이 14세의 제수였던 리젤로트와 생시몽 공작 그리고 당조 후작의 기록 모두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메리는 제임스 2세와의 사이에서 일곱 아이를 낳습니다만, 유아기를 넘긴 아이는 아들 제임스와 막내인 딸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스튜어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중 결혼한 자녀는 후에 "올드 프리텐더"라고 불리는 제임스 밖에 없었죠.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20살에 천연두로 사망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