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13) 모데나의 마리아 : 제임스 2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13. 6. 1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의 왕비들...(13) 모데나의 마리아 : 제임스 2세의 왕비(두번째)




모데나의 마리아

마리아 베아트리체 안나 마르게리타 이사벨라 데스테

잉글랜드의 메리 왕비

Mary of Modena

(Maria Beatrice Anna Margherita Isabella d'Este)

( 5 October [O.S. 25 September] 1658 – 7 May [O.S. 26 April] 1718)

1680년 


모데나의 마리아는 1673년 11월 23일(구력, 당시 잉글랜드는 그레고리우스력을 만드는데 교황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잘맞는 달력인 그레고리우스력을 쓰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의 결혼식때 남편인 요크 공작 제임스를 처음 만났습니다. 

제임스는 마리아보다 40살로 마리아보다 25살이나 많았었으며 애딸린 홀아비로 제임스의 장녀인 메리는 그때 11살이었죠. 게다가 제임스는 천연두를 앓아서 흉터로 그다지 외모가 멋지지 않았고, 게다가 말까지 더듬었다고 합니다. 열다섯살의 마리아는 이런 남편에게 매우 큰 실망감을 가졌는데 그녀는 남편을 처음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요크 공작 제임스


마리아와 제임스의 두 딸들들중 둘째인 앤의 사이는 처음에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11살이었던 메리는 새어머니와 도리어 비슷한 나이대였기 때문에 좀더 가까운 사이가 될수 있었을듯합니다. 제임스는 두딸들에게 어린 새 아내를 소개할때 "너희들의 새 놀이 친구들 데려왔단다"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앤과 함께 놀면서 친밀함을 쌓아갔고, 결국 의붓딸의 애정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크 공작 제임스와 요크 공작 부인 앤 

그리고 둘의 딸인 메리와 앤


영국에서 요크 공작부인 메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마리아는 요크 공작부인으로 일년에 오천파운드의 연금을 받았으며 자신들만의 가솔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박하는것을 즐겼는데, 그녀의 시녀들은 공작부인이 하루라도 도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여길정도였었습니다. 이때문에 자잘한 도박빚에 시달렸다고도 합니다.


비록 첫 만남에 무척이나 실망했지만, 마리아는 곧 남편인 제임스와 관계가 좋아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에게 제임스는 매우 잘 대해줬었을듯합니다. 둘의 첫 아이인 캐서린 로라가 1675년 태어납니다. 캐서린이라는 이름은 찰스 2세의 왕비인 캐서린 왕비의 이름을 딴것이었고 로라라는 이름은 마리아의 어머니 이름을 딴것이었죠. 하지만 이 이아는 영아시절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마리아는 의붓딸인 메리와도 친하게 지냈는데 레이디 메리는 1677년 사촌인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했었으며,이때 마리아는 메리의 동생인 앤을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요크 공작부인 메리


마리아는 1675년부터 1678년까지 매년 네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영아기를 넘긴 아이는 둘째였던 딸 이사벨라밖에 없었죠. 1678년 영국내 가톨릭 교도를 몰아낼려는 음모였던 포피시 음모(Popish Plot)에 마리아의 남편인 제임스가 타켓이 됩니다. 요크 공작은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것이 알려졌으며 이때문에 주요한 타켓이 된것이었죠. 요크 공작은 결국 영국을 떠나야했었죠. 요크 공작 부부와 요크공작의 두딸인 레이디 앤(앤공주)와 레이디 이사벨라는 오라녜공비(요크공작의 장녀인 메리)를 만난다는 명목으로 브뤼셀로 향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남편의 새 정부인 캐서린 새들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망명생활과 남편의 외도에 큰 좌절감을 느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로마로 가서 어머니를 만난뒤에야 겨우 힘을 얻을 정도였죠.


하지만 요크 공작부부는 곧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됩니다. 국왕인 찰스 2세가 위중했기때문이었죠. 왕위계승자였던 요크 공작은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왔는데 찰스 2세의 서자이자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먼마우스공작 제임스 스콧이 왕위계승을 위협할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찰스 2세는 다행히 회복했지만 동생이 너무 빨리 돌아왔다고 여겼으며 요크 공작부부를 에든버러로 보냈습니다. 아직까지 포피시 음모로 인한 여파가 진행중이었기 때문이었죠. 이때 요크 공작의 두 딸인 앤과 이사벨라는 부모와 떨어져지냈는데, 마리아는 이사벨라와 떨어져 지내는것에 매우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681년 이사벨라가 사망하자 슬픔으로 인해 마리아는 종교에 더 몰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리의 딸 이사벨라


1682년이 되어서야 요크 공작 부부는 잉글랜드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또 다른 아이를 임신중이었고 8월에 샬럿 마리아라는 이름의 딸을 낳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3주 정도밖에 살지 못했고, 요크 공작은 아이의 죽음에 상심하면서 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는동안 다른 아이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할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요크 공작에게는 정치적으로 더 상실감이 컸는데, 찰스 2세의 서자였지만 신교도의 지원을 받는 조카 제임스 스콧 때문이었죠. 찰스2세와 제임스에 대한 암살음모가 진행되었는데 이 암살음모가 발견된 직후, 제임스 스콧의 지위가 더 올라갔으며 가톨릭인 제임스에 대한 의회의 불만이 한층 가중되던 시기에 이런 승진은 요크 공작의 계승권에 위협이 될만한 사항이기도 했었습니다.


먼마우스 공작 제임스 스콧

찰스 2세의 서자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