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11)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 찰스 2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3. 5.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의 왕비들...(11)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 찰스 2세의 왕비(세번째)





카타리나 데 브라간사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Braganza

Catarina Henriqueta de Bragança;

(25 November 1638 – 31 December 1705) 



잉글랜드에서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에 대한 경계가 강했는데, 특히나 찰스 1세때 내전을 겪으면서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귀족사회에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컸었죠. 캐서린은 가톨릭 교도였지만 드러내놓고 가톨릭에 대한 지지나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른 문제에서 처럼 잉글랜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이것은 종교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잉글랜드에서의 국왕에 대한 불만과 가톨릭에 대한 반감은 캐서린을 정치적 타켓으로 자주 거론되게 만듭니다.

1675년 캐서린이 또 병을 앓게 되자 귀족들은 다시 이혼문제를 들고 나오게 됩니다. 병약하며,후계자도 낳을수 없는 왕비와 이혼하고 신교도 공주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죠. 물론 찰스 2세는 이를 거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에 잉글랜드에서 모든 가톨릭 사제가 추방당하게 됩니다. 캐서린의 고해신부마저 추방당한 상황이었는데,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사제이자 외교관이었던 인물이 캐서린의 시종무관으로 왔었지만 그 역시 얼마후 추방당했고, 캐서린은 궁정에서 더욱더 외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다른 문제들처럼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신앙심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찰스 2세는 이런 캐서린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매우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었습니다.


캐서린 왕비


이런 외로움은 루이즈 드 케루얄이 찰스 2세의 정부로 궁정에 왔을때, 캐서린이 남편의 정부에게 호의를 품게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합니다. 캐서린 왕비는 루이즈 드 케루얄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특히 "Popish음모"때 루이즈 드 케루얄을 보호해줬다고 합니다.

Popish 음모사건은 사실상 캐서린의 지위도 위협하는 사전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반가톨릭 열풍에 불을 지른 것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국왕을 암살하려했다는 음모입니다. 1678년 이 음모에 대해서 알려졌지만 사실상 이 음모는 날조된것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내의 가톨릭교도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죠. 이때 캐서린이 찰스 2세의 의사와 짜고 독살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만, 찰스 2세가 직접 캐서린이 그럴리가 없다고 확인시켜주므로써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넘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왕비였던 캐서린 조차도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기에 당연 정부였던 루이즈 드 케루얄은 말할 필요도 없었을듯합니다. 위험에서 벗어난 캐서린이 루이즈 드 케루얄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루이즈 드 케루얄

찰스 2세의 정부

그녀는 원래 찰스 2세의 여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시녀였다고 합니다.



1685년 찰스2세는 죽어가고 있었으며, 캐서린은 남편의 가톨릭에 대한 호의를 알았고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늘 다른 여자가 있었던 남편이었지만 캐서린은 늘 남편에게 충실했었기에 남편이 죽어가자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어가는 남편에게 자신이 그의 삶에서 방해가 됐다면 용서해달라는 쪽지를 보냈는데 찰스 2세는 "이 가여운 사람! 내게 용서를 구하다니? 내 마음을 다해서 그대에게 용서를 빌겠소"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찰스 2세


남편이 죽은 직후, 캐서린은 여전히 잉글랜드에서 머물렀는데 1685년 남편의 서자였던 먼마우스공작 제임스 스콧이 숙부였던 제임스 2세에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잡힙니다. 캐서린은 그를 위해 시동생에게 중재를 요청합니다만, 제임스 스콧의 목숨을 구할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캐서린은 조카인 메리2세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3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만, 잉글랜드 내에서 가톨릭교도에 대한 제한이 더 심해졌고 캐서린은 더욱더 궁정에서 외로운 처지가 됩니다. 의회는 캐서린의 가톨릭 시종들의 숫자마저 제한했었는데 캐서린은 이에대해 어떤 발언도 할수 없었습니다.



캐서린


이런 상황은 결국 캐서린이 고향인 포르투갈로 돌아가는것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1699년 캐서린은 고향인 포르투갈로 돌아갔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캐서린은 조카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후에 주앙 5세)의 보모가 됩니다. 캐서린이 포르투갈로 돌아갈때쯤 주앙의 어머니인 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가 사망햇었는데 이때문에 왕자는 큰 슬픔에 빠져있었고, 캐서린은 이런 왕자를 잘 다독였으며 이런 고모를 주앙은 매우 잘 따랐다고 합니다. 또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사이에 조약을 맺을때 캐서린은 이를 후원했으며 동생인 페드루2세가 부재시에는 섭정의 일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캐서린의 조카 

주앙 5세


캐서린은 잉글랜드에서 그다지 인기 있는 왕비는 아니었지만, 여러가지 영향을미쳤습니다. 특히 영국에 차마시는 습관을 들여온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에 영국에서는 차마시는것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인도쪽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포르투갈 궁정에서는 차마시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죠. 캐서린 왕비는 찰스 2세와 결혼한뒤, 잉글랜드로 와서 포르투갈에서 처럼 오후에 티타임을 가졌으며, 이후 잉글랜드와 영국에서 차를 마시는것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캐서린 왕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