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9)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 찰스 2세의 왕비(첫번째)

엘아라 2013. 5.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찰스 2세의 왕비를 할 차례군요.

음냐 이제 스튜어트 왕가도 머지 않았군요.-0-;;;


영국의 왕비들...(9)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 찰스 2세의 왕비(첫번째)





브리간사의 카타리나

인판타 카타리나 데 브라간사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Braganza

Catarina Henriqueta de Bragança

(25 November 1638 – 31 December 1705) 


포르투갈의 공주인 카타리나 데 브리간사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와 루이사 데 구스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주앙 4세는 브리간사 공작으로 에스파냐의 국왕으로부터 포르투갈 왕위를 되찾아 왔었습니다. 브리간사 공작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가문으로 왕가의 분가중 하나였죠.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시절부터 에스파냐 국왕들이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햇었는데,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때 브리간사 공작이자 카타리나의 아버지인 주앙이 에스파냐 국왕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아온것이죠.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루이사 데 구스만은 8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인 후안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의 딸로 루이사의 할아버지인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카타리나의 부모

포르투갈의 주앙 4세와 그의 부인인 루이사 데 구스만



카타리나가 어린시절,에스파냐와의 투쟁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햇지만, 카타리나는 행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특히 리스본을 매우 사랑햇다고 합니다.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루이사 왕비는 정치적 야망이 큰 여성이었습니다만, 아이들을 돌보는것도 매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이들과 오래 머물렀으며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 감독했었죠. 카타리나는 어린시절 왕궁 근처의 수녀원에서 교육받았으며 늘 아이들을 챙기는 어머니를 존경의 눈빛으로 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동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을 너무 감싸고 도는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어린시절의 카타리나


포르투갈의 국왕의 딸로 카타리나는 유럽의 많은 왕족들의 구혼 상대가 됩니다. 그녀와 혼담이 오간 사람들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의 사생아였던 오스트리아의 후안,앙리 4세의 손자중 한명인 보퍼트 공작 프랑수아 드 방돔,프랑스의 루이 14세.잉글랜드의 찰스 2세등이 있었습니다. 그중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과 프랑스와의 동맹이 물건너가게 되면서(이때 루이 14세는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기로 했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에 유용할것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혼담이 오간 대상중 한명


결혼협상은 찰스1세가 통치하던 시절부터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내전때문에 한동안 혼담은 중단되었다가 왕권이 복구된뒤 찰스 2세가 즉위한 뒤에 다시 결혼협상이 진행됩니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와의 협력이 필요했으며,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의 식민지 등의 경제적 이익이 필요했었기 때문에 둘의 결혼은 성사가 됩니다. 결혼 조건으로 잉글랜드는 탕헤르(북부아프리카)와 붐바이의 일곱 섬(인도)를 요구했으며,브라질과 동인도에서의 무역권도 요구했습니다. 또 포르투갈에서의 자유무역과 200만 포르투갈 크라운(약 3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반면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해군과 육군의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었죠.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카타리나는 1662년 5월 포르투갈을 떠나 잉글랜드의 포츠머스로 갑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도착한지 일주일후인 5월 21일 포츠머스에서 찰스 2세와 결혼는데 결혼식은 먼저 가톨릭식으로 비밀리에 치뤄졌으며, 이후에 공식적으로 영국 국교회식으로 결혼식이 치뤄집니다.


이제 카타리나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비인 캐서린이 됩니다만 잉글랜드에서의 카타리나의 삶은 매우 힘들었었죠.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