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7)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 찰스 1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3. 4.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흠냐...이거 세번째에서 끝내고 싶은데...잉글랜드 내전은 뒷감당이 안되는 이야기라서 말입니다..ㅠ.ㅠ

우리가 일반적으로 "청교도 혁명"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이 바로 잉글랜드 내전입니다.

예전에는 청교도 혁명으로 불렸는데 현재는 "내전"이라는 개념으로 바뀐듯하군요. 사실 이건 내전이 맞거든요.

이 잉글랜드 내전은 더 큰 의미로는 "세왕국 전쟁"의 일부에 속합니다. 찰스 1세 당시에는 잉글랜드.아일랜드,스코틀랜드가 각각 독립적 나라였으며 군주가 동일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이 세나라에서 일어난 왕당파와 비왕당파사이의 전쟁을 통칭해서 세왕국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는듯합니다.


그런데 그럼 명예혁명은 "오라녜공의 잉글랜드 침공"인가?=-=;;


영국의 왕비들...(7)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 찰스 1세의 왕비(세번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헨리에타 마리아 

찰스 1세의 왕비

Henrietta Maria of France 

(Henriette Marie de France;) 

(25 November 1609 – 10 September 1669)

1636년

여전히 반다이크



가정적으로 행복했던 시기에도 사실상 헨리에타 마리아의 행복이 깨질 불안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죠. 특히 의회와 국왕 사이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외국인인 가톨릭 교도인 왕비탓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당내나 후대의 대부분의 주류의견은 헨리에타 마리아가 심약한 찰스 1세를 부추겨서 내전을 지속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헨리에타 마리아의 권력은 제한적이었으며 결국 내전의 원인은 찰스 1세 본인의 의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네요. 상황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내전으로 인해서 헨리에타 마리아의 행복한 삶은 끝나게 됩니다.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

...여전히 반다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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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일련의 반란 사건뒤에,1642년 8월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서 내전을 시작됩니다. 이때 헨리에타 마리아는 헤이그에 가 있었습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오라녜 공의 장남과 결혼한 장녀인 메리와 함께 네덜란드로 갔었는데 그녀는 왕실 보석을 팔거나 저당잡혀서 전쟁의 자금을 마련는것과 오라녜공이나 덴마크 국왕등 유럽 다른 왕가의 지지를 얻기 위한 협상을 위해 헤이그로 갔던 것이죠. 하지만 헨리에타 마리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먼저 그녀의 보석은 팔기에 너무나 비쌌으며, 상인들은 후에 잉글랜드 의회가  보석에 대한 모든 사건을 불법으로 규정할경우, 돈을 한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보석을 뺏길것에 두려워했었습니다. 어쨌든 헨리에타 마리아는 조그만한 보석 일부만 팔아서 돈을 마련할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잉글랜드에서 그녀가 왕관의 보석을 팔아서 내전을 위해 쓰려한다는 소문을 돌게 했으며 결국 헨리에타 마리아의  잉글랜드내의 평판은 더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프린세스 로열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빌렘

헨리에타 마리아의 장녀와 사위 

후에 영국의 윌리엄 3세의 부모

..반다이크..-0-;;

완전히 빅토리아 여왕이 빈터할터에 열광했던것처럼 찰스1세네는 반다이크에 열광하신듯...


헤이그에서 돌아온 헨리에타 마리아는 내전을 피해 있었습니다. 몇몇 신하들은 전쟁 초기 의회와의 평화 협정을 위해 헨리에타 마리아가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했지만, 그녀는 거부했었죠. 그리고 1643년 가을에나 되어서야 남편과 다시 합류할수 있었습니다. 1644년 헨리에타 마리아는 다시 임신했으며, 그녀는 안전을 위해 남편을 떠나 배스로 이동했으며 후에는 엑서터로 갑니다. 이곳에서 헨리에타 마리아는 딸인 헨리에타를 낳지만 의회군이 이곳까지 몰려들었으며 헨리에타 마리아는 잡힐것에 대한 두려움에 갓 낳은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향했죠. 의회 해군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리고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도착래서 친정식구들의 보호를 받게 되됩니다. 이후 그녀의 남편인 찰스1세는 의회군에 의해 점차 열세가 되었으며 1646년에는 거의 의회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찰스 1세는 간신히 남은 군대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피할수 있었습니다. 


고모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소개 받는 루이 14세

상복을 입은 여성이 안 왕비이고 어린 두 소년중 앞쪽 소년이 루이 14세이고 그 옆이 동생인 필리프입니다.

가운데 흰옷이 헨리에타 마리아이고 그 옆은 헨리에타 마리아의 오빠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이죠


프랑스로 간 헨리에타 마리아는 파리에서 정착했으며, 프랑스에서 지지세력을 규합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왕위계승자인 아들 찰스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 프랑스로 오게 되죠. 프랑스에서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과 자신의 처지에 매우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1647년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이 의회와의 평화협정을 거부했다는것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1648년부터 1651년 사이에 일어난 두번째 내전에서 찰스와 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은 패배했으며, 의회군에 의해서 찰스는 잡히게 됩니다. 이 시기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을 위해 군대를 보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주변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망명중이었던 왕비의 거처에는 잉글랜드의 왕당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곳에 모인 왕당파들은 서로 불화를 했으며 이들은 서로들간에 다툼을 벌렸으며 마구 결투를 했었다고합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런 그들을 진정시키는데 노력해야만 했었죠.



내전중 참모회의 중인 찰스 1세

1642년의 한 전투 전날이라고 합니다.


1649년 헨리에타 마리아의 행복이 끝나게 됩니다. 멀리 떨어져있었던 그녀의 남편인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서 처형당한 것이었죠.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게다가 프랑스에서의 상황 역시 좋지 못했는데 당시 프랑스도 내전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녀는 생제르맹에 머물고 있었고, 남은 잉글랜드의 왕당파 모두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자 이제 국왕으로 선포된 찰스 2세 주변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쾰른으로 옮겨갔으며, 왕당파 대부분은 그를 따라갔고 이제 헨리에타 마리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매우 약화 됩니다.



포로로 잡힌 후의 찰스 1세

한 여성이 국왕에게 꽃을 선물하는 모습입니다.

이 직후 찰스 1세는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됩니다.


자료&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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