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흑..위키에도 내용이 많은데 왜 책을 보고 더 길게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길게 쓰는건 새해 특집이나 할때 하는 건데 말입니다.
네편이내로 무조건 줄여봐야겠습니다.--;;;
영국의 왕비들...(6)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 찰스 1세의 왕비 (두번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헨리에타 마리아
찰스 1세의 왕비
Henrietta Maria of France
(Henriette Marie de France;)
(25 November 1609 – 10 September 1669)
1632년
반다이크
프랑스의 공주인 앙리에트 마리는 1625년 5월 대리결혼을 치루고 한달후인 1625년 6월 영국에서 찰스1세와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이제 그녀는 영국에서 "헨리에타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찰스 1세는 아내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잉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식 축약형인 "메리"라는 이름을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열다섯살의 어린 소녀였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영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만 처음부터 결혼생활을 순탄치 않아습니다.
결혼직후 대관식이 열렸는데, 잉글랜드의 젙통에 따라 신교식으로 대관식이 열렸습니다. 이에 구교도였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가톨릭식의 대관식을 원하게 되죠. 하지만 찰스 1세는 이를 거부합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후로도 평생 가톨릭에 열성적이었는데, 특히 결혼초에는 훨씬더 종교에 심취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가톨릭에 대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잉글랜드 의회와 귀족사회에 반감을 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헨리에타 마리아는 결혼할때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자신의 staff들을 데려왔습니다. 시녀와 고해 신부,요리사,의사등등으로 구성되었던 이들에 대해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다지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 조약의 일부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왕비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찰스 1세는 아내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불만을 품었으며 자신과 아내 사이에 놓인 장애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미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버킹엄 공작은 왕비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지만 어린 왕비의 주변인물들은 그에 대한 걸림돌이었죠. 결국 버킹엄 공작은 왕비와 주변인물들에 대한 "편견"을 국왕에게 심어주게 되었고 찰스 역시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부부사이는 냉랭함이 지속되게 됩니다. 결국 찰스 1세는 후에 아내의 프랑스인 시녀와 시종들 대부분을 프랑스로 돌려보냈고,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대부분 외국으로 시집가는 공주들이 겪는 일로, 헨리에타 마리아의 올케였던 안왕비도 똑같은 일을 겪었었죠.
헨리에타 마리아
반다이크 그림이 아님-0-;;
...음냐 반다이크 그림이랑 좀 비슷하긴 하죠..단지 반다이크 그림이 더 예쁘다는...-0-;;
어린 신부였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시집왔을때 영어도 할줄 몰랐으며, 영국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남편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몰랐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어린 소녀였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늘 진지한 인물이었던 찰스 1세에게 이런 시도는 도리어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헨리에타 마리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되었으며 찰스가 늘 신뢰했던 버킹엄 공작은 이런 오해를 부채질할뿐이었습니다.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
그는 찰스의 아버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로, 찰스 1세와 죽이 잘맞았다고 합니다.
그는 왕비에 대해서도 국왕에게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는데 왕비의 프랑스인 고용일들은 이의 큰 걸림돌이었으며, 그는 왕비의 측근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생기긴 했군요..ㅎㅎㅎ
이런 냉랭함이 끝난것은 1628년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한뒤였습니다.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는 찰스 1세의 유일한 친구였으며 형제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으며 우울함은 오래 지속되었죠. 그리고 이런 우울할때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바로 아내인 헨리에타 마리아였습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의 냉랭함에 우울해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매우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으며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죠. 찰스는 아름다운 아내의 위트있는 이야기에 위안을 얻었으며 서로에 대해서 더 잘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찰스와 헨리에타 마리아는 깊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둘은 조금만 떨어져 지내도 서로를 그리워했습니다. 언제나 근엄하고 진지했던 찰스는 아내에 비해 덜 열정적으로 보였습니다만, 그 역시 아내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죠.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
반다이크
헨리에타 마리아는 1629년 첫번째 아이를 낳게 됩니다만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죽었습니다. 하지만 다음해에 후계자가 될 아들 찰스가 태어났으며 이제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의 사랑과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었기에 모든것을 다 얻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일곱아이들이 더 태어나게 되죠. 또 헨리에타 마리아는 아이들을 많이 낳았음에도 언제나 건강을 유지했었습니다.
두 아들인 찰스와 제임스와 함께 있는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
헨리에타 마리아의 삶은 행복의 정점에 있었고 이제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여러가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찰스 1세처럼 예술감각이 뛰어났으며, 이때문에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찰스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는 그림에 대한 안목이 매우 뛰어나기도 했었죠. 헨리에타 마리아가 좋아하고 후원했던 화가들은 이탈리아 화가였던 Oraio Gentileschid,귀도 레니등이 있었습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 앤 왕비가 후원했었던 스코틀랜드 가면극에 대한 핵심 후원자가 되었으며 시어머니처럼 자신이 직접 가면극에 출연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작곡도 후원을 해서 잉글랜드 작곡가인 니콜라스 레이니어를 후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헨리에타 마리아는 조각이나 여러 디자인등에도 관심을 가졌는데,이니고 존스 같은 인물이 헨리에타 마리아를 위해 건축디자인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그녀는 남편처럼 정원꾸미기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No More Shall Meade
니콜라스 레이니어
그리니치의 퀸즈 하우스
이니고 존스에 의해서 완성됨
1630년대까지 헨리에타 마리아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비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헨리에타 마리아의 행복은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깨지게 됩니다. 1640년대 내내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쌓였으며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런 내전상황의 중심에 놓이게 되죠.
자료&그림 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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