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뭘할까 고민해봤는데 여왕하는것보다 여왕님 남편들을 일단 해볼까합니다.-0-;;;
하다가 보면 뭔가 되겠죠..ㅎㅎㅎ
..ㅠ.ㅠ 네 사실 빌헬미나 여왕 읽을것이 너무 많아서 그냥 남편이야기 적당히 할려고 합니다..ㅠ.ㅠ
[네덜란드 여왕 양위 특집]네덜란드 여왕의 남편들...(1)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네덜란드의 헨드릭 공
Duke Henry of Mecklenburg-Schwerin
Prince Henry of the Netherlands
Heinrich Wladimir Albrecht Ernst
(19 April 1876 – 3 July 1934),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발데미르 알브레히트 에른스트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그의 세번째부인인 슈발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복형이자 후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령을 상속받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는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으며 그의 장녀인 알렉산드린은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고 차녀인 체칠리에는 독일의 마지막 황태자비였죠. 하지만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하인리히의 이복 누나인 마리일듯합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고 러시아에서 "미헨 대공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였기 때문입니다. 미헨대공비는 동서였던 마리야 황후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이끌어가던 인물이었으며 언제나 "야심만만하다"라는 평가를 듣던 사람이었죠. 그녀는 아들인 키릴이 황제가 되길 바랬다고도 합니다.
하인리히의 부모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그의 세번째 부인인 슈발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하인리히가 일곱살때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여러나라를 돌면서 여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직업군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실상 하인리히처럼 아들 많은 가문의 막내아들인 경우는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살길을 개척해야 했는데 많은 이들이 성직자나 군인의 길을 갔었습니다. 하인리히 역시 직업군인으로써의 평범하게 살거라고 생각했을듯합니다.
하인리히의 삶이 바뀐것은 1900년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약혼하면서입니다. 네덜란드 의회는 여왕에게 적당한 배필을 찾길 원했는데 너무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대가문의 후계자여도 안되는 조건이었죠. 너무 한미한 가문은 여왕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남편감이었으며, 너무 대가문인 경우 네덜란드의 내정에 다른 나라가 간섭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였죠.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은 독일의 오래된 왕가중 하나였으며 하인리히의 누나들은 러시아의 대공비,올덴부르크 공작부인등이 있었죠. 게다가 하인리히는 막내아들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을 상속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기에 적당한 신랑감이었죠.
하인리히와 빌헬미나 여왕의 약혼 사진
1901년 2월 하인리히는 빌헬미나 여왕과 결혼했으며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헨드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빌헬미나와 하인리히의 결혼생활은 점점 불행해졌는데 하인리히는 맘좋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반면 빌헬미나는 언제나 의무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죠. 여왕의 의무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남편을 받아들일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했고 결국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수익에 대한 문제로 하인리히는 고국에서의 수익이 끊어지게 되면서 언제나 돈이 부족했으며 여왕은 남편의 이런 빚에 대해서 매우 얹잖게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결혼사진
게다가 후계자문제까지 겹치면서 네덜란드에서의 하인리히의 삶은 좀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빌헬미나 여왕은 1902년 첫번째 유산을 했는데 이때 아이가 유산된것은 하인리히로부터 여왕이 성병을 옮아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이후 수많은 유산을 한끝에 1909년 외동딸인 율리아나가 태어나게 되죠. 하인리히는 외동딸인 율리아나를 매우 끔찍하게 아꼈다고 합니다.
외동딸인 율리아나와 함께 있는 빌헬미나 여왕
여왕과 하인리히는 결혼생활내내 불화가 심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딸인 율리아나에게는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하인리히의 공적인 삶은 정치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삶이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군 지위를 수여받았지만 그것은 여왕의 남편으로 여왕을 대리하는것이었죠.정치에서는 전혀 영향력을 가질수 없었는데 특히 딸인 율리아나가 태어났을때 그는 딸의 섭정지위에서도 배제될정도였으며, 그의 아내인 여왕 역시 이에 동의했기에 그를 더 좌절하게 만들었을듯합니다.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기에 그는 여러가지 사회사업에 열을 올렸는데 특히 네덜란드 스카웃을 결성하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또 네덜란드 적십자사 총재였으며 여러가지 단체의 회장직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1928년 하계 올림픽 개회식의 하인리히
올림픽 기간이랑 여왕의 휴가기간이랑 겹쳤는데 올림픽 위원회에서 올림픽 기간을 여왕에게 먼저 알려주지 않았다고 빌헬미나 여왕이 버럭 대면서 휴가 가버리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남편인 헨드릭이 개회 선언을 했다고 합니다.-0-;;;
하지만 하인리히의 사생활은 매우 복잡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왕의 남편들이 겪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겪었었죠. 가부장적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던 시절에 아내의 신하로 산다는것은 여전히 힘든일이었고 그는 이런 문제를 다른 여성을 찾아다니면서 해소했었던듯합니다. 일례로 딸인 율리아나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때, 하인리히에게 누군가 "당신딸은 매우 똑똑하고 다른 여자학우들을 사귈수 있을겁니다"라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 하인리히는 "그애가 똑똑한것은 어머니를 닮은것이고, 여자들을 사귀는것은 날 닮은것이오"라고 답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Mien Abbo Wenneker라는 여성과는 오래도록 관계를 지속해서 여러명의 아이를 낳을 정도였죠.
또 하인리히는 사냥과 바다로 나가는것을 즐겼는데,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그가 의무를 소홀히 하게 했습니다. 그는 멋진 요트를 마련해서 여자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는 날이 점차 많아졌었죠.
하인리히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됩니다. 살이 찌기 시작했고 류머티즘도 생겨났죠. 1929년 첫 심장마비가 왔으며 1934년 두번째 심장마비가 옵니다. 그리고 두번째 심장마비 며칠후 사망합니다.
빌헬미나 여왕은 문란한 사생활에 빚을 지고 의무에 소홀한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왕은 남편이 죽은 뒤에 좀더 남편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다음카페 로얄하우스(http://cafe.daum.net/yulia0818)의 boccacio님의 글 "네덜란드 여인 천하"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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