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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여왕 양위 특집]네덜란드 여왕의 남편들...(3)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엘아라 2013. 4. 2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마지막이군요.

아시다시피 살아있는 왕족은 관심이 없어서 베아트릭스 여왕 남편 이야기는 거의 못들어본듯하네요

아...베아트릭스 여왕이 결혼할때 남편이 나치랑 연관되었다고 데모했었다는 이야기는 본것같기도 하네요.


[네덜란드 여왕 양위 특집]네덜란드 여왕의 남편들...(3)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네덜란드의 클라우스 공

Klaus-Georg Wilhelm Otto Friedrich Gerd von Amsberg 

Claus George Willem Otto Frederik Geert van Amsberg 

Prince Claus of the Netherlands

(6 September 1926 – 6 October 2002)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는 독일출신의 동아프리카 농장주였던 클라우스 펠릭스 폰 암스베르크와 그의 부인인 부쉐-하우젠 남작녀인 괴스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암스베르크 가문은 독일의 하급 귀족가문으로 작위는 없지만 독일 귀족으로 인정받는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탄자니아에서 태어난 클라우스는 1933년까지 가족과 함께 탄자니아에서 머물렀지만 이후 여섯누이들과 함께 니더작센에 있는 조부모의 집에서 살았으며 다시 1936년에서 1938년까지 탄자니아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클라우스는 독일로 돌아왔는데, 처음에는 포메른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만, 아프리카에서 거주했었던 그는 이곳에 적응하지 못햇으며 조부모가 있는 곳의 지역 김나지움을 다녔다고 합니다. 2차대전중 여느 독일 청소년들처럼 그도 히틀러 청소년단등의 나치와 연결된 단체에 가입했었습니다. 그리고 1943년 열여섯살에 RAD(Reichsarbeitsdienst)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동프로이센의 비행장에서 일을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군인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됩니다만 금방 미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통역과 운전사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클라우스는 1945년 크리스마스때 독일로 돌아올수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1947년이 되어서야 아프리카의 수용소에서 풀려나 독일로 돌아올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클라우스는 공부를 더하기로 결정했으며 밤부르크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이때 그는 고학생으로 온갖일을 다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클라우스는 법률사무소에서 잠시 일했었는데 여기서 서독에서의 유대인들의 권리를 되찾는 일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 일을 한후 클라우스는 외교관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1958년 시험에 합격해서 외교관이 됩니다. 이후 외교관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이나 여러 아프리카나라등에서 근무했었습니다.


1962년 클라우스는 친구의 파티에서 네덜란드의 왕위계승자인 베아트릭스 공주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년 반년뒤에, 헤센가문의 수장인 모리츠와 자인-비트겐슈타인의 타티아나의 결혼식때 둘은 다시 만나게 되죠. 1963년 클라우스는 독일로 돌아와서 독일 외무성에서 근무했었는데 모리츠의 결혼식 이후 그는 베아트릭스 공주와 지속적으로 만났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에 대해서 비밀이었는데 지인이엇던 자인-비트겐슈타인의 리하르트(덴마크의 베네딕테 공주의 남편)가 둘이 사귀는것을 가려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1965년 5월 한 사진사에 의해서 둘의 관계가 발각됩니다. 그리고 둘의 사진이 영국과 네덜란드 언론에 공개되었고 결국 언론은 공주가 사랑에 빠진 남자를 찾아내게 되죠. 그리고 1965년 6월 클라우스와 베아트릭스 공주는 약혼을 발표합니다.



1959년 베아트릭스 공주


둘의 결혼에 대해서 네덜란드 국민이나 언론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클라우스는 독일 출신이었으며 히틀러청소년단 같은 나치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치열했으며 많은 이들이 죽었기에 이런 전력이 있는 사람을 왕위계승자의 남편으로 맞는다는것은 국민들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의회에서는 클라우스가 여왕의 남편감으로 적당한지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결국 공주와 클라우스와의 결혼을 승인해줍니다.


1965년 12월 클라우스는 독일 국적을 버리고 네덜란드 국민이 되었으며,1966년 3월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나치당원이었던 독일인"이 왕위계승자의 남편이 되는것에 대해서 네덜란드에서는 매우 크게 실망했으며 결혼식 당일날 결혼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날정도였다고 합니다.


 클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아내의 그늘에 가려진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교관이었고 늘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았기에 네덜란드의 아프리카 정책에 대해서 관여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다는것을 알았고 이때문에 이후 그는 주로 "자선사업"을 기본으로 하는 정책에만 어느정도 관여했다고 합니다. 

클라우스는 네덜란드 내에서 자신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2차대전을 경험한 나이든 사람들은 클라우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클라우스는 이들과 잘 지내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는데 네덜란드어를 열성적으로 배우는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아내인 베아트릭스와 함께 있는 클라우스


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이 즉위한뒤 클라우스는 이제 여왕의 남편으로 살았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 매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1982년이후 수년간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했었다고 합니다.그리고 1990년대 초반에는 파킨슨 병의 징후를 보였으며 1990년대 후반 암으로 수술을 받았으며,2000년부터는 건강이 더 나빠지게 됩니다. 2002년 장남의 결혼식에는 참석했지만, 그해 10월 사망했습니다.


클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 아내인 베아트릭스 여왕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성실햇으며,반듯한 사람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인파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장례식

Attribution: Looi from nl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