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기욤 결혼 끝났는데 왜 특집 계속하냐고 물으신다면 그동안 글을 안 읽었다고 답할수 밖에 없습니다.-0-;;
저도 생일날 놀고 싶었어요..ㅠ.ㅠ
하여튼 그래서 룩셈부르크 대공가 이야기를 좀더 해볼까합니다.
사실 하일라이트는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의 시집살이가 아닐까합니다만 그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분들은 진짜 관심없거든요.--;;;
앙리 대공의아버지인 장 대공은 아직 살아 계신다죠. 그런데 좀 건강이 안 좋으신듯 하더군요.
결혼식때도 보니까 그리 정정한 모습이 아니더라구요.-0-;; (그건 신부 아버지도 마찬가지더라는..)
장 대공 이야기를 할까 부인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부인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부인인 조제핀-샤르로트 대공비는 벨기에 공주거든요.
[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6) 조제핀-샤를로트 대공비
벨기에의 조제핀 샤를로트
룩셈부르크의 대공비
Princess Joséphine Charlotte of Belgium
(Joséphine Charlotte Ingeborg Elisabeth Maria Josepha/Marie-José Margarethe/Marguerite Astrid)
(11 October 1927 – 10 January 2005)
이 사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앙리 대공 어머니랑 꼭 닮으셨군요-0-;;
룩셈부르크의 대공비인 조제핀 샤를로트는 벨기에의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벨기에의 국왕이었던 레오폴 3세였으며 어머니는 스웨덴의 공주였던 아스트리드였습니다. 조제핀-샤를로트의 어머니인 아스트리드는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있었는데 아스트리드는 벨기에에서 매우 인기있는 왕비였죠 (심지어는 한 설문조사에서는 아스트리드가 벨기에로 시집온후 스웨덴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결과까지 나오기도 했었다.)
조제핀-샤를로트의 부모
벨기에의 레오폴 3세와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
약혼때쯤
조제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것에 대해서는 훗날 대공비 자신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제핀-샤를로트의 어머니인 아스트리드는 아이를 가졌을때 조제핀 황후(나폴레옹 1세의 첫번째부인)의 이야기에 매료당했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태어나면 조제핀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벨기에 왕가에서 조제핀이라는 이름은 낯선 이름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조제핀-샤를로트의 할아버지인 알베르 1세가 가장 사랑한 누이 이름이 조제핀이었기 때문이었죠.
재미난것은 가계를 올라가면 조제핀-샤를로트는 조제핀 황후의 후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조제핀 황후의 손녀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 오스카르와 결혼해서 스웨덴의 요세피나 왕비가 되었습니다. 조제핀-샤를로트의 어머니인 아스트리드는 이 요세피나 왕비의후손이었죠.
또 벨기에 왕가 역시 보아르네 가문과 연결됩니다. 알베르 1세의 외할머니는 바덴의 요세핀으로 요세핀의 어머니는 외젠드 보아르네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친척이었던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였습니다. (이때문에 알베르 1세의 누이가 조제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죠.)
스웨덴의 요세피나 왕비
조제핀 황후(나폴레옹의 첫번째부인)의 손녀
아스트리드 왕비는 요세피나 왕비의 증손녀였습니다.
아스트리드 왕비는 딸을 "little Jo"라고 부르면서 매우 사랑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제핀-샤를로트는 부모와 함께 외각에서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죠. 하지만 그녀는 곧 비극을 경험합니다. 여덟살 무렵 부모와 함께 스위스의 휴양지에 갔다가 부모는 잠시 더 있다 오기로 했었고 아이들이 먼저 벨기에로 돌아옵니다. 그때 아스트리드는 넷째아이를 임신중이엇죠. 그리고 국왕부부는 함께 드라이브를 나섰습니다. 국왕이 직접운전했었죠. 그리고 교통사고가 납니다. 국왕은 팔과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살았습니다만, 왕비는 사망합니다.
이 소식은 조제핀-샤를로트에게는 물론 전 벨기에 국민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스트리드 왕비와 세아이들
왕비가 안고 있는 아이가 현 벨기에 국왕인 알베르 2세입니다.
...왜 기욤 결혼식에 벨기에 왕가가 다 왔나 싶었더니 앙리 대공이 알베르 2세 조카군요-0-;;
어린 조제핀-샤를로트는 처음에는 왕궁에서 개인 교육을 받았습니다만, 1940년 기숙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조제핀-샤를로트는 다시 개인교습을 받아야했습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0년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레오폴 3세는 독일에 항복했지만 망명을 거부하고 벨기에에 남았습니다. 이후 레오폴 3세는 독일의 감시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쯤 레오폴 3세는 "릴리안 바엘"이라는 여성과 재혼합니다.
릴리안 바엘을 소개한 사람은 조제핀-샤를로트의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였다고 합니다. 아들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소개했고 레오폴 3세는 사랑에 빠졌죠. 사실 전쟁이 끝난후 결혼하려했지만 릴리안 바엘은 곧 임신했기에 결혼을 1941년 결혼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벨기에 국민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일중 하나였습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스트리드 왕비를 대신하게된 릴리안 바엘은 아스트리드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연합군의 레오폴 3세에 대한 흑색선전 역시 안 좋은 평판을 남깁니다.
하지만 릴리안 바엘(결혼후 레티 공비)는 전처 자식들에게는 잘 했다고 알려져있긴합니다. 어린 조제핀-샤를로트는 리리안 바엘에게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나겨 물을정도였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글에서는 레티 공비가 전처의 자식들에게 돌아갈 아스트리드 왕비 보석들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처분했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조제핀-샤를로트는 아버지와 함께 독일로 보내져서 가택 연금을 당했습니다. 1945년이 되어서야 연합군에 의해 벨기에 왕실 가족들은 모두 풀려났고 스위스로 갑니다. 이때 조제핀 샤를로트 역시 스위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레오폴 3세는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벨기에로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1950년이 되어서야 돌아갈수 있엇지만, 전국민적 반대에 부딪혀 결국 다음해에 퇴위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제핀 샤를로트는 아버지가 벨기에로 돌아갈때 함께 돌아갔으며, 공주로써의 의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1953년 조제핀-샤를로트는 룩셈부르크 대공의 후계자인 장과 결혼합니다. 샤를로트 여대공과 펠릭스 공의 장남이었던 장은 망명한 어머니 샤를로트 여대공을 따라 영국의 장교로 입대해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었습니다. 조제핀-샤를로트와 장의 결혼은 정치적 목적이 강했고 조제핀-샤를로트는 이런 결혼에 불안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행복했던 결혼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룩셈부르크 군주의 아내로써 조제핀-샤를로트는 수많은 사회사업에 헌신했으며 특히 가족과 아이들의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장 대공과 조제핀-샤를로트 공주의 결혼식
사진출처
http://knowingtheroyals.wordpress.com/2011/06/01/princess-josephine-charlotte-of-belgium/
조제핀-샤를로트가 가장 좋아한 취미는 가드닝과 원예학이었습니다. 그외에도 사냥,승마,낚시,수상스포츠등을 즐겼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조제핀 샤를로트는 폐암으로 77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조제핀 샤를로트와 며느리인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이야기는 2002년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의 폭로로 이야기 됩니다.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는 평민 출신으로 부모는 쿠바출신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녀가 "혼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합니다. 대공가에서는 결혼을 반대했고 가장 반대했던 사람은 앙리 대공의 할머니인 샤르로트 여대공이라고 이야기되고 있었죠.
하지만 2002년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는 자신의 시어머니에 대해 강하게 비난합니다. 자신을 쿠바출신의 평민이라고 무시했으며 절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고 언론에 폭탄 선언을 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출신때문에 남편인 앙리 대공이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어느정도 예견된 이야기이긴 했습니다. 구식 왕가 출신이던 조제핀-샤를로트는 비록 대중을 위해 참긴 했었지만 아들이 평민과 결혼한다는것에 충격받았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프레데리카 왕비는 늘 입버릇처럼 자녀들에게 신분에 맞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고 누누이 강조할정도였다고 하죠.-0-;;) 하지만 이것은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긴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언론들은 대공비의 폭탄선언에 당황해하면서 시어머니의 흉을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런식으로 하는것에 대해 비판적이기도 했었습니다.
앙리 대공과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의 결혼 발표
왼쪽이 조제핀-샤를로트 대공비 맨 오른쪽이 장 대공
솔직히 결혼 사진보고 살짝 충격이...--;;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 젊은시절 진짜 예쁘시더라구요..-0-;;
맘고생이 쬐금 심하셨던듯...-0-;;;
사진출처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텔레그라프 "Grand Duchess 'does a Lady Di'"(2002년 7월 3일 자 기사)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http://knowingtheroyals.wordpress.com/2011/06/01/princess-josephine-charlotte-of-belg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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