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베네룩스

[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4) 여대공 마리-아델라이드

엘아라 2012. 10.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번에는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입니다.

사실 이분은 카페에서 연재해주시기로 해주신 분이 계셔서 애타게 그 연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흑 글쓰시는분이 좀 한가해지셔서 글쓸 시간이 나야하는데 말입니다. 진짜 글을 써주시는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0-;;)

하여튼 얼떨결에 먼저 제가 잠시 봐야겠습니다.--;;

이런이런...


마리 아델라이드 여대공은 좀 뭐랄까 본인 스스로 삶이 참 답답했을듯해요..

[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4) 여대공 마리-아델라이드





Maria-Adelheid or Marie-Adélaïde, 

Grand Duchess of Luxembourg 

(14 June 1894 – 24 January 1924)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은 기욤 4세와 인판타 마리아 안나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태어난 다섯명의 동생들이 모두 여동생들이었기에 결국 룩셈부르크는 다시 계승문제에 휩쌓이게 됩니다만 결국 1907년 마리-아델라이드가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해결이 됩니다.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므로써 후계자 문제가 일단락 된것이었죠.

아버지 기욤 4세가 죽은 1912년 2월 마리 아델라이드는 룩셈부르크의 첫 여대공으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이때 그녀는 만 17살이었기에 만 18살이 되는 1912년 6월까지 어머니 마리-안 대공비가 섭정으로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인판타 마리아 안나

룩셈부르크의 대공비


마리-아델라이드는 다른 자매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교육받았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인 룩셈부르크의 군주가 신교도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기욤 4세는 가톨릭교도와 결혼하므로써 자녀들 모두를 가톨릭으로 키우는데 동의했고, 이때문에 이후 가문의 종교는 가톨릭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델라이드는 매우 독실한 신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녀가 "여대공"의 지위에 있을때 조금 문제가 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는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정치적인 입장도 매우 강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은 이전까지 대공들이 정부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것과는 대조되는것으로 당연히 의회와 여대공사이의 마찰은 피할수 없는것이었습니다. 또  마리-아델라이드의 정치적 견해는 종교적 관점이 강하게 들어가게 되죠. 가장 대표적인 예가 즉위식날 마리 아델라이드는 교육에서 가톨릭 사제의 역할을 축소하자는 법안의 승인을 거부하기도 했었습니다. 

마리-아델라이드의 강한 종교적 성향외에도 1차대전이 일어나면서도 문제가 됩니다. 1914년 8월 독일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를 점령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는 점령에 대한 저항운동은 하지 않아지만, 대신 룩셈부르크가 중립국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지속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과의 사이는 점차나빠지게 되고, 여대공의 반대파들은 여대공이 친독일파이기에 점령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왠지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1세랑 입장이 좀비슷하셧던듯..--;;)


 

마리 아델라이드 여대공


그리고 전쟁이 끝나가자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은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대공이 친독일파였기때문에 점령을 허용했었던것이라는 것이죠. 국내는 물론 룩셈부르크에 큰 영향을 줄수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여대공을 매우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당시 벨기에와 프랑스의 주요 정치가들이 룩셈부르크 대공령의 해체를 바라고 있었기에 룩셈부르크 의회는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에 대한 이웃국가의 비난을 무시할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의회는 여대공이 "초헌법적행위"를 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대공의 퇴위에 대한 이야기를 논의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여대공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수상과 오랜시간 논의한후 25살의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은 1919년 1월 14일 여동생인 샤를로트에게 대공지위를 넘기고 퇴위하게 되죠.


퇴위한후 마리-아델라이드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1920년 이탈리아에 있는 카르멜 수녀회에 들어가게 딥니다. 그리고 나서는 로마에 있는 " the Little Sisters of the Poor"에 "가난한 이들의 마리 자매(Sister Marie of the Poor)"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델라이드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기에 수녀원에 남을수없을정도가 되었고 결국 수녀원을 떠나야했죠. 그리고 1924년 바이에른의 호엔부르크 성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이 되어서야 룩셈부르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대공가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마리-아델라이드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