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룩셈부르크 대공의 후계자인 기욤이 10월 20일 결혼합니다. 그에 맞추어서 룩셈부르크 대공가문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합니다. 룩셈부르크의 정부 수장은 공식적으로 룩셈부르크의 대공(Grand duke of Luxembourg)입니다.룩셈부르크는 좀 복잡했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습니다만 빌렘 3세가 사망한뒤 빌헬미나 여왕이 네덜란드 여왕으로 오르면서 룩셈부르크의 대공령은 살리카 법때문에 나사우 공작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죠.
[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 (1)
룩셈부르크가 유럽 역사에 제대로 등장하기 시작한때는 10세기 경으로 아르덴의 백작이었던 지그프리트 1세가 룩셈부르크에 성을 짓고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시작됩니다. 후에 룩셈부르크를 다스리던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보헤미아 지방을 다스리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 가문이 단절되면서, 가문의 마지막 후손은 이 지역을 인근의 부르고뉴 공작에게 룩셈부르크와 그 인근 영지를 팔아 넘기게 되죠.
이후 부르고뉴 공작의 상속녀였던 마리 드 부르고뉴가 합스부르크가문으로 시집가면서 룩셈부르크는 18세기 말까지 합스부르크가문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마리 드 부르고뉴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녀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첫번째부인
부르고뉴 공작령은 현재 베네룩스 삼국과 프랑스 일부지역을 영지로 하는 곳으로 중세때부터 부자로 소문이 파다한 지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뀌게 된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전쟁과 이어지는 나폴레옹 전쟁때였습니다. 프랑스는 현재 베네룩스 삼국지역을 장악했었으며 나폴레옹 전쟁이후에도 쭈욱 그랬었죠. 하지만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유럽의 질서를 재편했던 빈 회의에서 여러 나라들이 룩셈부르크를 탐내게 됩니다. 프로이센은 윌리히 공작령의 연장으로 룩셈부르크를 가지길 원했고, 복위한 부르봉 왕가나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등도 룩셈부르크를 탐내게 되죠. 가장 크게 목소리를 냈던 곳은 두곳인데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였습니다.
여기서 룩셈부르크는 대공령이 되었고,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는 방식이 선택됩니다.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는 다른 나라이며 단지 국가의 수장만 같은 사람일 뿐인것이죠.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 국왕은 중부독일에 있던 가문의 영지인 나사우-오라녜 공령을 프로이센에 넘겼고 이에 프로이센도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의 대공이 되는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운동을 할때 룩셈부르크 역시 독립운동에 가입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가 독립할때 룩셈부르크가 벨기에에 편입될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런던조약에서는 룩셈부르크 영토 일부를 벨기에에 포함시킬뿐 여전히 네덜란드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룩셈부르크의 영토변화
보면 아시겠지만 벨기에가 독립할때 영토의 반 이상을 잃게 됩니다.
룩셈부르크가 네덜란드와 완전히 분리된것은 빌렘 3세가 사망한 뒤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빌헴 3세는 후계자로 딸 빌헬미나밖에 없었죠. 이때문에 "살리카 법"을 인정하던 룩셈부르크는 빌헬미나 여왕을 군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결국 살리카 법으로 룩셈부르크의 대공이 된 사람은 빌헬미나 여왕의 멀고먼 친척인 나사우 공작 아돌프였습니다.
네덜란드 왕가와 나사우 공작가문은 원래 "나사우 백작"의 후손이었습니다.이 가문은 독일 중심부의 발람계와 네덜란드쪽의 오토계로 나뉘게 됩니다. 장자계열인 발람계는 독일쪽 영지들을 상속받아 후에 나사우 공작이 되고, 차자계열이었던 오토계는 네덜란드쪽을 상속받아서 후에 네덜란드 국왕이 되죠.
18세기가 들어서면서 이 두분가의 계승자들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문에 두 가문은 영지가 다른 가문으로 넘어갈것을 우려해서 두 분가중 어느쪽이든 남성후계자가 없어질경우 다른분가쪽이 계승받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자 룩셈부르크 대공령은 가문의 협약에 따라 발람계열의 나사우 공작이었던 아돌프가 계승하게 됩니다.
나사우 공작이자 발람계의 첫번째 룩셈부르크 대공이었던 아돌프는 원래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빌헬름대에 나사우 공작이라는 타이틀로 가문의 다른 분가와 함께 나사우 영지를 통치하게 되는데, 빌헬름과 공동 통치를 하던 다른 인물들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결국 빌헬름이 나사우 공작령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문은 나사우 공작가문으로 불리게 되죠.
대공 아돌프
나사우 공작
아돌프의 아들인 기욤 4세는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나와 결혼해서 모두 여섯명의 딸을 낳습니다. 이렇게 되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살리카 법"이 문제가 됩니다. 기욤의 숙부이자 아돌프의 이복동생이었던 니콜라우스는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가문의 계승 권리가 불확실했었죠. 다시 말해서 기욤의 딸들이 룩셈부르크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살리카 법"이 걸림돌이 되었다면, 니콜라우스가 계승하기 위해서는 "귀천상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기욤은 룩셈부르크 법률을 고쳤고, 조카들의 상속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연금을 지금하기로 하고 딸의 상속을 인정받게 했습니다.
기욤 4세
기욤 4세의 큰딸이자 룩셈부르크의 첫번째 여대공이었던 마리 아델라이드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는데, 1차대전 당시 마리 아델라이드의 통치 행위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마리 아델라이드는 동생인 샤를로트에게 양위한후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죠.
언니 마리 아델라이드의 양위를 받은 샤를로트 여대공은 현 대공인 앙리 대공의 할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사촌인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과 결혼했고, 아들인 장에게 양위를 합니다.
장대공은 벨기에의 조제핀-샤를로트 공주와 결혼했으며 현 대공인 앙리 대공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그 역시 어머니처럼 아들을 위해 양위했습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나와 여섯 딸들
가운데가 대공비이고 맨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같은데 누가 샤를로트 여대공인지 확실히 모르겠군요..ㅠ.ㅠ 마리-아델라이드 뒷쪽에 있는 여자 아니면 대공비 옆에 앉은 여자같은데 말입니다.-0-;;;
앙리 대공은 쿠바 출신의 평민 여성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습니다. 가문에서 엄청나게 반대했었지만 결혼했는데,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는 훗날 시어머니가 죽은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 시켰다고 언론에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앙리 대공의 장남이자 후계자가 될 아들이 바로 기욤입니다.
기욤과 스테파니
그리고 양가 가족들
왼쪽에서 마리-테레사 대공비, 장 대공(앙리 대공의 아버지,퇴위했음), 앙리 대공,라누아 백작, 라누아 백작부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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