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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5) 여대공 샤를로트

엘아라 2012. 10.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원래 안하는데 지금 장대공부터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군요..ㅎㅎㅎ

그냥 한꺼번에 묶어서 할까 싶기도 하구요.--;;;;;;

사실 룩셈부르크 대공가도 스웨덴처럼 실권이 거의 없을겁니다. (스웨덴은 법률로 국왕의 정치적 권력을 배제했거든요.-0-;;) 그래서 이후로는 그다지 많은 이야기가 나올것 같지도 않다죠.

뭐 샤를로트 여대공이랑 조제핀-샤를로트 대공비가 현 대공비인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를 시집살이 시켰다는 이야기 정도랄까..그외에는 별로 없을듯하네요.-0-;;;;


[룩셈부르크의 기욤 결혼 특집] 룩셈부르크 대공가...(5) 여대공 샤를로트






Charlotte, 

Grand Duchess of Luxembourg 

( 23 January 1896 – 9 July 1985) 


샤를로트 여대공은 기욤 4세와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그녀는 룩셈부르크 대공위와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태어날땐 여성이었기에 그랬고, 여성의 계승권이 인정된 뒤에는 언니 마리-아델라이드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1919년 언니 마리-아델라이드가 퇴위하자 샤를로트는 여대공이 되어야했죠.


샤를로트 여대공이 즉위했을때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왜냐면 대공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었기 때문이었죠. 여대공은 이를 진정시켜야했는데, 1919년 9월에 대공가 존속이 담긴 국민투표가 실시됩니다. 여기서는 국민들은 샤를로트 여대공이 대공령의 수장이 되는 것을 인정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국민투표의 결과로 개정된 헌법에서는 대공의 정치적 권력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샤를로트 여대공


여대공으로 인정받은 샤를로트 여대공은 서둘러 결혼을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부르봉-마르마의 펠릭스 공으로 둘은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은 샤를로트 여대공의 막내 이모였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와 그의 남편인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이었습니다. 펠릭스공의 누나인 지타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이기도 했습니다.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조용히 살것같았던 여대공의 삶이 바뀐것은 2차세계대전때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룩셈부르크는 "중립"을 천명했지만 독일은 룩셈부르크를 점령합니다. 이때 여대공은 프랑스에 망명하는것에 회의적이었지만 정부 각료의 뜻을 따라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갑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곧 독일에 협력하면서, 여대공과 그 일행은 프랑스를 떠나야했죠. 에스파냐를 통해 포르투갈로 가게 됩니다.

이때 독일 정부는 여대공에게 룩셈부르크로 돌아오라고 회유를 합니다. 하지만 여대공은 언니 마리-아델라이드가 1차대전때 룩셈부르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알아기 때문에 독일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갔고 그 뒤로는 캐나다와 미국까지 갑니다. 아이들을 안전한 캐나다로 보낸 여대공은 미국을 참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을 여러번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1943년 여대공은 런던으로 돌아와서 망명정부를 구성합니다.  BBC 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면서 저항운동을 독려했으며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저항운동의 중심이 되죠. 여대공의 여동생인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왕태자의 부인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후 남편과 함께 망명중이었는데 그녀는 헝가리에서 독일군에 붙잡혔고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후 안토니아는 풀려났지만 이후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로 인해서 건강을 해쳤고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이에른 가문이 반나치이기도 했지만, 언니 샤를로트 여대공이 룩셈부르크 저항운동의 중심이기도 했기에 안토니아가 이런 혹독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됩니다.

또 여대공의 아들이자 대공가의 후계자인 장은 1942년 영국의 연대에 자원입대해고 이때 그는 "룩셈부르크 중위"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안토니아

샤를로트의 여동생

그녀의 남편인 루프레히트는 그녀보다 30살이나많았습니다. 그리고 재혼이었죠.

루프레히트의 첫번째 부인인 마리 가브리엘라는 안토니아의 이종사촌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여대공은 룩셈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64년  아들 장에게 대공위를 양위한후 퇴위해서 조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로 음악과 가드닝등의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인 펠리스공은 1970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녀 역시 1985년 암으로 사망하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