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마리아 테레지아 다했다고 좋아했는데 쓰다보니 애들이 너무 많아서 아들이랑 딸이랑 나눌까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열여섯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살아남아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만 해도 열세명이나 된다죠.-0-;;;;;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40)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네번째)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
1754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모두 열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영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은 자녀들은 모두 열세명이었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이들 대부분을 전쟁의 시기에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과 칠년전쟁동안 여전히 많은 아이들을 낳았는데 막내였던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7년 전쟁기간에 태어났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나이가 39살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아이들은 궁정의 예식보다는 좀더 자유롭게 키웠습니다. 이때문에 아이들은 여러가지 행사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기도 했었죠. 이런 모습은 훗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고 이상적 가족관계로 여겨지던것과 유사해보입니다만, 프란츠 슈테판은 앨버트 공과 달리 정부가 있었댑니다. 그것도 딸네미랑 비슷한 나이대였다고 하더군요.--;;;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트레스 받는 남편을 위해 남편의 정부를 눈감아줬다고 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이 그린 가족 모습
마리아 테레지아의 살아남은 아이들중 큰딸이었던 마리아 안나 여대공은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이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매우 똑똑했지만, 호흡에 문제가 있었으며 이때문에 등이 굽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애때문에 왕족 남편감을 구할수 없자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녀가됩니다. 하지만 가족과의 교류는 계속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은 마리아 안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자연과학을 좋아하던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딸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안나는 상류사회를 싫어했는데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탐탁치 않아했기 때문이었죠.
마리아 안나
둘째딸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두 정략결혼을 해야했었던 동생들과 달리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무일푼에 상속권마저 멀었던 그에게 마리아 테레지아는 엄청난 재산과 테센 공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딸이 자신 곁에 살도록 배려했죠. 이때문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늘 자매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런 자매들에 대해서 마리아 크리스티나 역시 어머니에게 자매들의 잘못을 이르는등의 행동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녀가 없었고 결국 테센 공작 작위는 조카인 카를 대공이 양자가 되어서 물려받게 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셋째딸은 마리아 엘리자베트였습니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원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프랑스로 시집보낼 궁리를 했습니다. 25살이던 1768년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막 홀아비가 되었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루이 15세의 왕비로 보내고 뒤이어 동생인 마리아 안토니아를 도팽의 아내로 보내려했죠. 하지만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천연두를 앓게 되었고 그녀의 얼굴은 결혼하기 힘들정도로 얽게 됩니다. 이때문에 결국 그녀는 결혼을 포기했고 큰언니인 마리아 안나처럼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궁정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
넷째딸이었던 마리아 아말리아는 어머니와 가장 많이 싸운 딸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팔츠-츠바이브뤽켄 공작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작은 영지를 가진 중요하지 않은 왕족이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르봉가문과의 우호를 추진하고 있었기에 딸의 바램과 달리 파르마 공작에게 시집보냅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어머니가 자신도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짝지워줄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강제로 파르마에 가야했고 이때문에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게다가 파르마 공작 역시 마리아 아말리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남자였죠. 마리아 아말리아는 동생들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안토니아와 매우 친했으며 결혼후에서 지속적으로 서신과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고 하네요.
마리아 아말리아
다섯째딸이었던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와 여섯째딸이었던 마리아 요제파는 서로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자매는 매우 잘 어울렸으며 교육도 함께 받아서 매우 친한 사이였죠. 마리아 요한나와 마리아 요제파 모두 나폴리 국왕과 혼담이 오갔습니다만 결혼하기전 둘다 천연두로 사망하게 됩니다.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와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요제파에 대해서는 나폴리로 시집가라고 했을때 오스트리아의 이익보다 남편의 이익을 우선하겠다고 해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화를 내면서 카푸친 영묘에 가서 참배하라고 했는데 이때 막 천연두로 죽었던 올케의 무덤을 참배한후 이에 감염되어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만, 이전에 이미 천연두에 감염되었으리라 추정한다고 하더라구요.
일곱째딸이던 마리아 카롤리나는 죽은 언니 대신 나폴리의 국왕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매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왕비였습니다. 특히 동생 마리아 안토니아와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역시 정략결혼이었기에 남편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서 모두 열여덞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딸은 자신의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2세와 결혼했었죠. (프란츠 2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에게 시집가게 되자 펄펄뛰었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딸인 마리 아말리는 프랑스 왕비가 됩니다만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에 찬성했던 남자의 아들과 결혼하는것에 열받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카롤리나
막내딸은 바로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우호의 표시로 도팽에게 시집갔습니다. 하지만 늘 사이 안 좋던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왕비는 프랑스 궁정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이유로 왕비가 아니라 첩자 취급을 받기도 했죠.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이 죽은뒤 역시 길로틴형을 당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 앙투아네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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