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신성로마제국의황후들(완결)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41)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다섯번째)

엘아라 2012. 9. 2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마리아 테레지아 마지막입니다.

진짜 오래하긴 했네요..한달을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로 버티다니 말입니다..ㅎㅎㅎㅎ


그런데 보니까 흑..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 다 끝나가서 또 가슴이 아픕니다.--;;

아이디어도 없어 읽은 글도 없는데 말입니다.-0-;;;;;;;;


이제 마지막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들 이야기나 좀 해보겠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41)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다섯번째)


열일곱명의 자녀들중 아들들은 모두 다섯명이었습니다. 그중 성인이 될때까지 성장한 아들은 네명이었습니다. 그중 둘째와 셋째 아들의 후손들이 현재 합스부르크가를 잇는 사람들이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 직후부터 아들을 원했습니다만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열일곱명이나 되는 아이들중 열두명이 딸이었습니다. 특히 결혼후 세딸을 낳았고 아버지가 죽은후에야 아들을 낳았기때문에 아들들에 대한 기대가 많이 컸었던듯합니다. 특히 장남인 요제프는 똑똑하기까지 해서 무척 기대했을듯합니다. 잘 되지 않았죠.그럼 아들들에 대해서 살펴볼까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그리고 자녀들


장남은 요제프로 후에 황제 요제프 2세가 됩니다. 그가 태어나기전 딸 셋을 낳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성 후계자가 너무나 필요했기에  성 요셉(성모 마리아의 남편)에게 기도드렸고 결국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때문에 성인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은 요제프가 된것이죠. (왜 할아버지 이름이 아닌가 싶었더니 말입니다.)

요제프는 아버지가 죽은후 황제위에 오릅니다만, 사실상 실제 권력자는 명목상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죠.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사이에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고 이런 문제는 결국 요제프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사실상 요제프는 아버지처럼 정치적 실권이 없었죠.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아들의 정책이나 사상을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혼문제 마저도 요제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첫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마저 거부하려했으니 그랬을듯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한 두번째 아내에게 잘해주지 않은것도 그랬을듯하구요.

요제프는 어머니가 죽은후 자신의 개혁정책을 추구했습니다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시대를 앞서 나간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제프 2세

똑똑했지만 까칠한 성격이었던 요제프2세는 냉소적인 말을 서슴없이 했었던 인물인듯합니다.



차남은 카를 요제프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와 백부의 이름이 붙여진 이 아들을 마리아 테레지아는 편애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딸네미도 편애하더니..--;;) 카를 요제프는 어린시절부터 "후계자"인 형에 대해서 매우 질투어린 시선으로 봤다고 합니다. 요제프가 형이 아니라면 자신이 황위를 이을수 있었을텐데 순전히 장남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된다는것은 불공평하다고 느꼈던듯합니다.

하지만 카를 요제프는 16살때 천연두로 사망하게 됩니다. 아들이 죽어가는것을 보고 울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이 살아서 어머니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할수도 있으니 그만 울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카를 요제프

그렇게 안 죽었으면 살아서 형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텐데 말입니다.-0-;;



삼남은 레오폴트로 후에 형의 뒤를 이어 황제 레오폴트 2세가 됩니다. 사실 큰형인 요제프는 황제위를 잇고 둘째형인 카를 요제프는 아버지의 개인 영지였던 투스카니 대공국을 상속받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셋째아들인 레오폴트는 자신의 살길을 마련해야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셋째아들을 위해 모데나 공작령의 상속녀와 결혼시켜 아들에게 모데나 공작 지위를 주려했습니다만, 카를 요제프가 16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는 투스카니 대공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이런 지위 변화로 인해 그는 에스파냐 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은후 투스카니 대공으로 형이 죽은뒤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12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의 아들인 프란츠가 태어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후계자가 태어난것에 무척이나 기뻐했으며 손자와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보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황제가 된후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다고 합니다. 외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후 혁명정부와 협상을 했던 문제에서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전에 읽은 글에서 "요제프가 살아있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것이다"라는 소리가 있던데 살짝 이해가 되는군요.)



레오폴트 2세

진짜 이쯤에서는 다시 헷갈리기 시작한다는..ㅠ.ㅠ



사남은 페르디난트로 후에 모데나의 공작이 되어서 오스트리아-에스테 분가를 열게 됩니다. 상속받을만한 영지가 없었던 그를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데나 공작의 상속녀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는 레오폴트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만, 레오폴트가 투스카니 대공국을 상속받게 되면서 그녀는 페르디난트와 결혼하게 된것이었죠. 결혼후 둘 사이에서는 모두 10명의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페르난디트는 결혼후 장인의 영지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통치를 배웠습니다만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장인에게서 이 모데나 공작령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의 장남인 프란체스코(프란츠)가 빈회의 이후에 다시 복고된 모데나 공작령을 상속받게 됩니다.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에스테 분가의 시조



막내아들은 막시밀리안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였습니다. (바로 위의 누나가 마리 앙투아네트) 그는 어린시절부터 사제로써의 길이 결정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이 군인으로써의 능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상속권이 없던 막내아들이 살아갈길로 성직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보통 상속권이 후순위로 밀리는 삼남 이후 아들들은 군인 아니면 성직자가 되더라구요. 그걸로 먹고 살아야하니..)물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앙심이 깊었기에 아들중 한명이 사제의 길을 가는것을 바랬을듯도 합니다.

막시밀리안은 숙부의 튜턴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고,쾰른의 선제후가 됩니다. (쾰른의 선제후직은  종교 선제후였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혁명전 누나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러 가기도 했으며, 또 베토벤의 초기 후원자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선제후로 자신만의 궁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죠.

하지만 프랑스 혁명전쟁이후 그는 쾰른을 뺏겼으며 죽을때까지 쾰른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막시밀리안

쾰른의 대주교

쾰른의 선제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